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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모저모

해남 해창 막걸리 예찬..1

by 북한산78s 201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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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한사의 서재
 원문링크 : http://blog.chosun.com/hansakds/7024036

글: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해창주조장'은 내비게이터에 뜨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시인 김남주 생가'를 대신 찍고 지난 주말 전남 해남군 삼산면까지 차를 몰았다. 1990년대 마흔 줄에 세상을 뜬 김남주·고정희 시인의 고향 마을이다. 진도 바다로 흘러가는 삼산천에 접어들면서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덤덤한 얼굴로 "조금 더 가라"고 일러준다. 고맙다 인사하고 막 차창을 올리려는데 덤덤하게 한마디 덧붙인다. "맛있어요." 해창주조장 막걸리가 맛있다는 얘기다. 400㎞ 길이 헛고생은 아니구나 안도했다.


해창주조장은 삼산천 곁 나직한 언덕에 서 있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아 너른 마당과 살림집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90년 된 일본식 이층집이다. 뜰엔 보랏빛 송엽국이 한창이다. 근육질 울퉁불퉁한 청가시나무와 모세나무에 세월이 배 있다. 낮은 담 너머 푸른 강과 고천암 들녘이 평화롭다. 200년 전 선승(禪僧) 백파(白坡) 선사가 거닐었다는 소요대(逍遙臺)가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이런 곳에서 익는 막걸리는 향이 좋을 수밖에 없겠다.


집이 비어 있어 뒷마당부터 구경했다. 90년 전 일본인 주인이 심은 거목들이 800평 정원에 들어찼다. 실화백 육박나무 가시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아왜나무 모과나무 마로니에들이다. 춤추듯 뒤틀린 배롱나무 네 그루는 많게는 육백 살을 먹었다. 못 파고 다리 놓고 뒤쪽 형제산까지 아우르는 정원은 조경학도들을 불러들인다. 이 정원을 연구해 학위를 딴 박사가 둘이나 나왔다고 한다.


정원은 지금 유월이 절정이다. 초록은 짙어 가고 바닥엔 온통 파란 이끼다. 빨간 찔레꽃, 노란 낮달맞이꽃, 자줏빛 우단동자꽃, 주홍 석류꽃이 원색 점을 찍는다. "쪼로롱 쪼로롱" "뻐꾹 뻐꾹"…. 갖가지 새가 무성한 나무에 숨어 갖가지 곡조로 지저귄다.



해창 막걸리.jpg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정원에 넋 놓고 있자니 안주인이 돌아왔다. 사 들고 온 토종닭을 뜰에 걸어둔 솥에 넣는다. 배달 나갔던 바깥주인도 왔다. 정원 긴 탁자에 막걸리를 내놓는다. 머위대나물, 마늘종장아찌에 아삭아삭 묵은 김치도 올랐다. 양은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우윳빛에 발그레한 누룩 기운이 살짝 감돈다. 은은한 과일 향이 난다. 쌀이 발효하면서 내는 사과향이다. 한 모금 들이켰다. 달지 않고 시원하다. 기분 좋은 감칠맛이 뒤따른다. 목 넘김이 비단결 같다. 누룩 향도 지나치지 않게 구수하다. 사이다처럼 달고 탄산가스 톡 쏘는 여느 시중 막걸리와는 영 다르다. 농촌진흥청이 공인한 전통주 소믈리에 1호 오형우가 최고 막걸리로 꼽을 만하다.


부부는 새벽 다섯 시 고두밥부터 찐다. 누룩도 만들어 쓴다. 발효를 앞당기려고 흔히 넣는 효모제 '술약'은 구경도 못했다. 누룩만으로 자연 발효시키느라 숙성 기간이 여느 막걸리 세 배, 보름이 넘는다. 물은 150m 지하수를 길어 쓴다. 막걸리통에 적힌 원료 표시는 딱 두 줄이다. 국내산 쌀 100%, 아스파탐 0.005%. 인공감미료 아스파탐은 떫은맛을 없애려고 600리터 발효통에 커피 스푼 둘만 넣는다. 보통 막걸리 10분의 1도 안 된다. 그렇게 빚은 막걸리를 하루 700통쯤만 걸러낸다.


토종닭이 익자 반년을 냉장 숙성시킨 막걸리를 내온다. 한 말 담가뒀던 것을 손님 온다고 손으로 체에 밭쳐냈다. 요구르트처럼 걸쭉하다. 쌀이 오래 삭아 달큰하고 솔향이 상큼하다. 유산균이 바깥 공기를 만나 뽀글뽀글 기포를 올리며 살아 숨 쉰다. 거목 그늘에서 온갖 새소리 들으며 얼근해진다. 이런 술자리는 처음이다.


쉰둘 동갑내기 오병인·박미숙 부부는 서울 살던 귀농인이다. 술꾼 남편은 10년 전 해남에 왔다가 해창막걸리에 반했다. 잡맛 없이 깔끔하고 기분 좋게 취하고 이튿날 깨끗했다. 해창막걸리를 3년 택배로 즐기던 부부에게 주조장 주인이 "나 대신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1937년부터 해 온 가업을 아들들이 이을 처지가 아니었다.


부부는 아무 연고도 없는 해남행을 결심했다. "막걸리가 맛없었다면 안 왔다"고 했다. 마을과 정원과 고택도 마음을 끌어당겼다. 아내가 막걸리 학교에 다닌 뒤 2007년 아들을 데리고 먼저 내려왔다. 해창막걸리 비법을 배우고 서울을 오가며 막걸리를 공부했다. 2년 뒤엔 남편이 직장을 정리하고 왔다. 지금까지 뗀 막걸리·전통주 교육과정이 일곱이다.


부부는 "유산균도 사람을 탄다"고 말한다. 날씨 따라 재료 따라 빚는 사람 기분 따라 들쭉날쭉하다. 비 오는 날이나 부부 싸움 한 뒤 걸러낸 막걸리는 맛이 없다. 새벽 여섯 시 갓 거른 막걸리를 빈속에 한잔 맛본다. 잘 익어 향이 좋은 날은 '오늘 누가 안 찾아오나' 싶다. 덜 발효돼 밋밋한 날은 '택배 주문이 안 왔으면' 한다. 그럴 땐 위에 맑게 뜨는 '청주'를 한 양동이 섞는다. 술 공장이 아니라 오롯이 부부만 하는 술도가여서 대장금처럼 영감(靈感) 떠오르는 대로 한다. 정 맘에 안 들면 몇 말이고 쏟아 버린다.


부부는 "막걸리를 싸고 천하게 빚으면 싸고 천한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해남 쌀과 물과 바닷바람에 자존심과 자부심 담아 술을 익힌다. 지난 몇 년 입맛에 맞는 막걸리를 찾아다니다 해창막걸리를 만났다. 다녀온 지 며칠 안 돼 그 정원 술자리가 어른거린다. 멀지만 않으면 다람쥐 제집 드나들듯 할 텐데.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chosun.com 2013.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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