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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 여객 터미널..

연안 여객 터미널 부두에는 하루를 섬으로 이동을 하는 여객선들이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을 한다.

서해안인천 앞바다 많은 섬들이 있는데 그동안 연륙교로 이여진 다리를 제외

하고 아직도 많은 섬들을 이곳 연안 여객 부두에서 이동을 하는 중요한 부두

라고 할 수가 있다.

자월도로 가는 여객선은 부두에서 출발을 해서 서서히 터미널은 멀어지고  여객선

은 순항 속도를 올리면서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어느덧 연안부두의 깃점인 등대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운항속도를 올리는 것 같다.

여객선 앞 선수 쪽으로  카메라를 들고나가니 시원스러운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서서히 송도신도시와

영종도로 연결되는 인천 대교가 앞으로 다가 오고 있다.

어느덧 여객선은 인천 대교 높은 주탑 사이로 운행을 시작하고 그동안 출퇴근을 하면서

부지런히 인천 대교를 오가기만 햇었지만 이렇게 새롭게 대교 주탑 밑으로 여객선을 타고

다리밑을 통과하니 새로운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인천 대교의 긴 스카이 라인이 이렇게 멋져 보이는 것은 이 다리를 건설하면서 얼마나 많은 

건설 인원들이 고생을 하였을까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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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속 아시아' 칼미키야(칼미크)공화국
높이 63m 유럽 최대 불교 사원 있어
강제 이주 속 가정 신앙으로 정체성 지켜
부처 진신사리 공개에 참배객 9만 명 방문

끝없이 펼쳐진 스텝의 지평선과 황금빛 불교 사원이 교차하는 땅. 러시아 남서부 카스피해 연안의 칼미키야 공화국은 흔히 ‘유럽 속의 아시아’로 불린다. 지리적으로는 유럽에 속하지만 역사와 문화의 뿌리는 중앙아시아와 몽골에 닿아 있다.

칼미크인은 몽골 서부 오이라트족의 후예다. 17세기 초 볼가강 하류로 이동해 정착하면서 지금의 칼미키야를 형성했다. 이들이 오래전부터 믿어온 티베트 불교는 오늘날까지 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축으로 남아 있다. 칼미키야는 유럽에서 불교가 주민들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은 유일한 지역으로 꼽힌다.

러시아 연방을 구성하는 자치공화국 가운데 하나인 칼미키야의 수도 엘리스타는 ‘불교와 체스의 도시’로 유명하다.

엘리스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금빛 지붕의 불교 사원과 곳곳의 체스 조형물이다. 도시의 중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황금 사원’이 서 있다. 높이 63m인 이 사원은 유럽 최대 규모의 불교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는 거대한 불상이 모셔져 있어 러시아의 한 도시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오어진

체스로 만든 도시

엘리스타가 ‘체스 시티’로 불리게 된 데에는 칼미키야 초대 대통령 키르산 일륨지노프의 영향이 컸다.

어릴 때부터 체스를 즐겼던 그는 14세 때 칼미크 지역 체스 챔피언에 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업가로 성공한 뒤 1993년 칼미키야 초대 대통령이 됐고, 1995년에는 세계체스연맹(FIDE) 회장에 선출됐다. 이후 2018년까지 장기간 세계 체스계를 이끌었다.

그가 꿈꾼 것은 칼미키야를 세계 체스의 중심지로 만드는 일이었다. 1998년 엘리스타에서 제33회 체스 올림피아드가 열리자 수도 외곽에는 대규모 체스 전용 복합단지인 ‘시티 체스(City Chess)’가 들어섰다. 실제로 1998년 대회에는 세계 각국의 남녀 대표팀이 대거 참가했다.

단지에는 국제대회를 치를 경기장과 선수·관광객 숙소 등이 들어섰다. 도시 일부를 체스를 주제로 설계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였다.

일륨지노프는 체스가 어린이의 논리적 사고와 집중력을 높인다고 믿었다. 그 결과 칼미키야 학교에서는 체스 교육이 적극적으로 도입됐고, 체스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칼미크 수도 엘리스타에서는 형형색색의 불교 사원들을 볼 수 있다. /사진=정병선 기자

스텝의 고독과 생명력

엘리스타를 벗어나면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건물은 사라지고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스텝이 시작된다.

칼미키야의 초원은 오랫동안 유목과 방목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과도한 방목과 건조한 기후가 겹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사막화가 심각하게 진행됐다. 최근에는 초원 생태계를 되살리기 위한 복원 사업도 계속되고 있다.

이 스텝을 상징하는 동물이 ‘사이가 영양’이다. 커다랗고 독특한 코를 가진 사이가는 빙하기부터 살아남은 오래된 종으로, 칼미키야의 광활한 초원에서 무리를 지어 이동한다. 초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사이가 떼는 칼미크 자연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칼미키야의 풍경에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강제 이주와 귀환이라는 아픈 역사가 함께 남아 있다.

1943년 스탈린 정권은 칼미크인 전체를 독일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칼미키야 자치공화국도 폐지됐다. 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스탈린 사후 강제 이주 조치가 해제되면서 칼미크인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단순한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고향과 공동체를 잃은 사람들에게 불교는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민족 정체성의 한 축이었다.

칼미크 엘리스타의 "샤카무니 부처님의 황금 거처". 유럽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다. /칼미크 관광청

불교가 살아남은 세 가지 이유

칼미크인들이 정교회 문화권인 러시아 안에서 수백 년 동안 불교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는 오이라트 민족 정체성과 티베트 불교의 결합이다.

칼미크인은 볼가강 유역으로 이동하기 전부터 티베트 불교, 특히 겔룩파 전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불교는 주변의 러시아 정교회권이나 이슬람 문화권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문화적 표지가 됐다. 종교와 민족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결합한 것이다.

둘째는 티베트 불교 세계와의 지속적인 교류다.

지리적으로는 티베트에서 수천㎞ 떨어져 있지만 칼미크 불교는 티베트와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승려들은 티베트 불교권에서 수행하고 경전과 교리를 들여왔다.

달라이 라마 14세도 칼미키야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1991년과 1992년, 그리고 2004년에 칼미키야를 찾았다. 특히 2004년 11월 말 엘리스타를 방문해 당시 칼미키야 대통령 일륨지노프와 만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의 외교 관계 등을 둘러싼 문제로 추가 방문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칼미크 불교 신자와 승려들은 인도 다람살라 등지의 티베트 불교 공동체와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셋째는 강제 이주 시대에 형성된 ‘가정 속 신앙’이다.

칼미크 불교가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것은 소련 시대였다. 불교 사원이 폐쇄·파괴되고 많은 승려가 탄압받았다. 1943년 민족 전체가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공개적인 종교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부 가정에서는 불상과 경전을 숨겨두고 노인들이 자녀와 손주들에게 기도법과 전통을 전했다. 사찰이 사라진 자리에 가정이 작은 사찰 역할을 한 셈이다.

시베리아의 가혹한 환경을 견디는 과정에서도 불교의 인내와 윤회, 업에 대한 믿음은 정신적 버팀목이 됐다. 종교 탄압이 역설적으로 민족과 신앙의 결속을 강화한 측면도 있었다.

 

 

 
칼미크를 체스 시티로 만든 일륨지노프 전 대통령. /사진=정병선 기자

소련 붕괴 뒤 찾아온 불교 부흥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칼미크 불교는 빠르게 부활했다. 특히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칼미키야를 이끈 일륨지노프 대통령은 불교와 전통문화 복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상징적인 결과물이 수도 엘리스타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황금 사원’이다.

불교 사원의 재건과 승려 양성, 해외 불교계와의 교류가 이어지면서 칼미크인들은 다시 세계 티베트 불교 공동체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칼미크인들에게 불교는 사찰에서 행하는 의식에만 머물지 않는다. 명절과 음식, 인사와 가족 의례 등 생활 곳곳에 불교 전통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명절이 샤간 사르(Tsagaan Sar)다. 샤간 사르는 칼미크인들이 지내는 전통 설날이자 봄맞이 명절이다. 몽골의 ‘차강 사르’, 부랴트의 ‘사가알간’과 같은 계통의 몽골계 음력설이다. 불교력과 음력에 따라 날짜가 달라지지만 대체로 2월에서 3월 사이에 찾아온다. 이 무렵 엘리스타 중앙사원에서는 새해의 평안과 복을 기원하는 법회와 전통 의식이 이어진다.

불교에서 중요한 달인 사가 다와(Saga Dawa)에도 여러 행사가 열린다. 석가모니의 탄생과 깨달음, 열반을 기념하는 기간으로 티베트 불교권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다. 또 미래불인 미륵불을 기리는 기도와 순행 의식, 달라이 라마의 생일인 7월 6일을 기념하는 행사 등도 열린다. 최근에는 종교 행사뿐 아니라 칼미크 전통 음악과 유목 문화, 초원의 자연을 결합한 다양한 문화 행사도 함께 개최되고 있다.

칼미키야의 불교가 국제적으로 다시 주목받은 계기도 있었다.

2025년 10월에는 인도 국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칼미키야 역사상 처음으로 엘리스타로 옮겨져 공개됐다. 인도 정부 대표단과 불교계 인사들이 함께한 이 행사에는 9만명이 넘는 참배객이 방문한 것으로 인도 정부는 집계했다. 러시아 한복판의 작은 자치공화국이 인도와 티베트 불교권을 잇는 국제 불교 교류의 무대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유럽 속의 아시아’를 찾아오는 여행자들

최근 칼미키야는 일반적인 유럽 관광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찾는 여행자들에게도 관심을 끌고 있다.

가장 큰 매력은 강한 문화적 대비다. 유럽 대륙을 여행하면서 고딕 성당이나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 황금빛 불교 사원과 마니차, 불교 깃발을 만난다. 수도를 조금만 벗어나면 나무 한 그루 보기 어려운 광대한 초원이 지평선까지 이어진다. 그 초원에서는 사이가 영양을 관찰하고, 밤에는 인공 조명이 거의 없는 하늘에서 별을 볼 수 있다.

엘리스타 역시 독특하다. 불교 사원과 소비에트 시대의 건축물, 체스를 주제로 만든 거리와 ‘시티 체스’가 한 도시에 섞여 있다. 러시아의 지방 도시이면서 동시에 몽골과 티베트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때문에 전형적인 관광 명소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찾아다니는 배낭여행객이나 오지 여행가들에게 칼미키야는 특별한 여행지로 받아들여진다.

칼미키야가 오늘날까지 ‘유럽의 불교 섬’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오이라트에서 이어진 강한 민족적 뿌리, 소련 시대의 박해 속에서도 가정에서 신앙을 이어간 공동체의 힘,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진행된 적극적인 문화 복원이 함께 작용했다.

끝없는 스텝 위에 세워진 황금빛 사원과 체스 도시. 칼미키야의 독특한 풍경 뒤에는 수백 년에 걸쳐 정체성을 지켜온 한 민족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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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월도 섬 트래킹.

지난달 9월에 추석연휴를 맞기 전에 인천에 섬 자월도를 나 홀로 다녀오게 되었다.

인천 앞바다에는 아기자기한 섬들이 무척이나 많은데 여간해서 시간을 할애해서

선뜩 다녀오는 것이 싶지는 않은 편이다.

섬으로 들어가려면은 기상 상황도 봐야 하고 이른 시간에 당일로 여행을 하려면은

일찍이 서둘려야 하는 문제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작년부터  인천시민만을 적용해서전임  유정복 전시장에 인천 여느 섬을 가드

라도 편도 요금을 천오백 원(1.500원)으로 책정해서 말도 안 되는 획개적인 요금으로

인천 시민만을 적용해 주어서 뱃삯 때문에 섬여행을 껴렷던 분들에게 아주 호기가

생긴 것이었다.(단 경기도나 서울 시나 타 지역분들은 정상요금)

 

인천 여객터미널에서 가장 멀다는 백령도 들어가는데도 쾌속선으로 4시간을 가야 하여

는데 요금이 천오백 원이니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갈 수가 인천시에서 요금을 지원해

주니까 가능 한일이다.

하여튼 서론이 길어졌는데 연안 터미널에서 첫배 07시 50 분배를 승선해서 나오는 시

간은 오후 4시 정각배를 3.000원 주고 왕복 승선권을 구입해서 배를 승선한다.

 

터미널에서 승선해서 출발을 영종도를 잇는 인천 대교 주탑밑을 통과하고 팔미도 옆

으로 지나고 해서 자월도에 한 시간 20분을 경과해서 붉은 달에 이름아 유래되었다는

자월도 달맞이 선착장에 하선을 한다.

오늘 트래킹 코스를 잡음 곳은 목섬-국사봉-장골해변을 거쳐서 하산을 하려고 계획

을 하였다.

 

가을 날씨는 이제 너무 덥지도 않은 날씨라서 산행하기에는 너무 맑은 날씨였다.

정말 미세먼지도 없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날씨여서 시정 거리는 너무 멀리

육안으로 보이는 것 같다.

북쪽으로는 영종도 인천 국제공항도 보이고 서쪽으로는 영흥도. 서남 쪽으로는 충남으로

보이는 대난지도. 남쪽으로는 소이작도. 대이작도. 승봉도가 육안으로 전부 보이는 것

같다. 

 

평일 이린 지라 드문 드문 나 홀로 섬을 찾는 분들도 꽤 만나고 산행을 하면은 다정스러운 인사

말로 다 산행 친구가 되고 좋은 것 같다.

이날 트래킹 한 거리는 약 10킬로 정도가 되는 데 무리 없는 산행 트래킹 길이였다.

 

자월도를 들려보고 내려오는 데도 오후 3시 경도 안 되는 것 같아서 4시까지 여유롭게 쉬다

승선을 하니 인천 여객 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오후 5시 20분 경이였다.

자월도를 찾은 날은 정말 시원스러운 바닷바람과 자월도 풍광을 즐겨보는 아주 좋은 섬 트래

킹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목섬은 작은 섬이 붉은 구름다리로 육지와 연결돼 있어 물때와 관계없이 걸어서 오갈 수 있어요. 다리를 지난 뒤 해안 데크길을 걸으면 파도와 바다 풍경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고, 주변에는 독바위와 떡바위 같은 바위 경관도 나타납니다. 

목섬에서 국사봉을 올라서기전에 만난 밤나무에서 떨어져있는 밤을 배낭에 제법 많이 주은것 같다.

밤알은 크지않으나 주운 밤을 집에가려오려하니  다람쥐 겨울 식량을 빼어온것이 아닌지 걱정이 든다.

국사봉은 해발 166미터로 소개되며, 정상에서는 승봉도와 이작도 등 주변 섬을 내려다볼 수 있어요. 달바위 선착장에서 목섬과 장골해변을 거치는 당일 코스는 약 10킬로미터 내외로 소개되지만, 중간에 쉬는 시간과 해안 산책 시간을 고려하면 여유 있게 잡는 편이 좋습니다. 

장골해변은 아카시아 숲과 완만한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캠핑과 해수욕을 함께 즐기기 좋아요. 큰 말해변은 물이 빠졌을 때 갯벌이 드러나며, 바지락과 소라·고동을 관찰할 수 있는 장소로 소개됩니다.

캠핑장은 바다 앞 데크 사이트를 갖췄으며, 전기 사용과 화장실·샤워실·세면장·분리수거장·관리사무소가 마련된 것으로 소개돼요.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해적선 놀이터도 있어 가족 단위 방문에 편리하지만, 주말과 성수기에는 미리 예약하는 편이 좋습니다.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자월도 달바위선착장으로 가는 배는 하루 5회 운항하며, 편도 약 1시간 15분이고 대인 운임은 15,600 원

부터입니다.

인천시민들은 2025년부터 인천 옹진군 여객 요금이 1.500원이 적용됩니다.

시간표와 요금은 날짜·선박에 따라 달라지므로 가보고 싶은 섬에서 출발일을 선택해 최신 정보를 확인하고 예매하는 편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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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1974년 8·15 육 여사 저격 사건
문세광 말고 다른 진범이 있을 수 없는 이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숱한 영부인이 있었지만, 1974년 8월 15일 불의의 총격으로 별세한 육영수 여사만큼 사람들의 기억에 짙게 남은 인물은 드물다. 그때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는 마치 세상 사람 모두가 어머니를 잃은 듯한 슬픔에 빠진 것 같았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틀린 기억이 아니었다는 것을, 얼마 전 국사편찬위원회가 공개한 당시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육 여사의 서거에 대해 국민적인 슬픔과 충격이 존재한다. 장례식에 대규모 인파가 몰렸고 이는 전적으로 연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육 여사는 남편에게 반대했던 사람들에게조차 널리 존경받은, 품위 있고 따뜻하며 동정심 많은 인물이었다.”

그 뒤로 어떤 영부인은 TV에 나올 때마다 급하게 채널을 돌려야 할 대상이거나 개그의 소재가 됐고, 어떤 이는 별 존재감이 없었다. 이번 ‘악인전’은 바로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의 저격범을 다룬다. 문세광(文世光·1951~1974)이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이번 회의 분량은 평소에 비해 길다. 그만큼 분명히 해야 할 사안이 많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얼치기 이념가’

문세광은 재일 교포 2세로, 국적은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이었다. 오사카에서 석면 제조업자인 부친 문병태와 모친 육말란 사이에서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条世光)다. 세이키(成器)상고를 다니며 정치 활동과 학내 분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동맹 휴학을 주도한 일도 있었다. 그러다 2학년 때 중퇴했다.

17세 때인 1968년 민단 산하의 청년 조직인 ‘한국청년동맹(한청)’ 이쿠노구(生野區) 지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말수가 적었고 순수한 일면도 있었으나 흥분하길 잘하고 격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청엔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소장파 활동가가 많았는데, 문세광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극좌 학생운동 단체와도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폭력혁명고교생전선’에 이어 재수생들이 가입한 ‘전국낭인공투회의(낭공투)’의 멤버이기도 했다.

문세광의 집에는 마오쩌둥 선집, 김일성 어록 등 꽤 많은 이념 서적이 있었으나 제대로 읽었기보다는 장식용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청년 시절 이념 서적을 잔뜩 사 놓고 ‘언젠간 읽어야지’ 다짐하는 사람이 과연 그뿐이었을까. 여기까진 그저 ‘좌익에 경도된 청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언제나 무서운 건 오히려 이념에 살짝 겉멋만 물든 얼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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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21세 때의 문세광.

“혁명 달성을 위해 박정희를 암살하라!”

1972년 3월, 21세의 문세광은 같은 재일 한국인인 강성숙과 결혼했다. 1973년엔 아들도 하나 낳았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뒤 일본 내 좌파 세력에 반한 감정이 높아졌다. 9월, 문세광은 조총련 이쿠노니시(生野西) 지부 정치부장 김호룡(金浩龍)과 만났다. 김호룡은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듭시다!”

여기서 문세광과 동갑인 여자 친구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가 등장한다. 중학교 동창생이었던 미키코와는 그해 여름 오사카에서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미키코도 유부녀였으나 남편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와는 별거 중이었다. 문세광은 미키코에게 “한국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아무래도 이 어린 불륜 남녀에게 ‘혁명’은 일종의 패션이자 불륜을 정당화하는 도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세광과 미키코는 11월에 신혼부부로 위장해 함께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미키코 남편 명의로 문세광의 사진을 붙여 발급받은 여권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때만 해도 세상은 무척 허술했다. 가짜 여권으로 국경을 쉽게 넘었다. 홍콩에서 권총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무렵 조총련에서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 현재 체감 가치로 환산하면 약 4500만원 정도에 이르는 금액이다.

1974년 5월 2일, 문세광은 오사카에 정박하고 있던 북한의 만경봉호에 승선했다.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던 만경봉호는 겉으론 ‘조총련 동포의 고국 방문’을 내세웠지만 실제 목적은 조총련 조직원에 대한 선내 정치 교육과 친북 세력 공작 추진이었다. 여기서 북한 공작 지도원과 40분 정도 면담했는데, 그는 문세광의 투쟁 경력과 암살 계획을 이미 알고 있다며 칭찬하더니 인삼주를 곁들인 식사를 제공하며 이렇게 말했다.

“남조선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사회 혼란을 조성해야 하는데, 박정희를 암살하는 방법 말고는 없소.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께서 직접 지시한 혁명 과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켜야 하오!”

문세광이 대답했다. “김일성 주석을 위해 생명을 바쳐 기필코 박정희를 암살하겠습니다.”

1년 넘게 사격 연습… 검지에 아령까지 매달았다

이후 문세광은 비밀 아지트에서 사격 훈련을 했다. 훈련 기간은 1년이 넘었다. 실탄을 구하기 어려워, 방아쇠를 당길 때 필요한 둘째 손가락의 악력(握力)을 키우는 데 힘썼다. 검지에 작은 아령을 달아 근육의 힘을 키우기도 했다. 실제 총으로 훈련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총을 다루는 데 서툰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문세광은 신장이 180㎝에 가깝고 몸무게가 약 80㎏ 정도였다. 당시로서는 눈에 띌 정도로 건장한 체구였다.

김호룡은 문학적 기질이 있는 자였던 것도 같은데, 문세광에게 이런 말도 했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저격 목표 1m 이내에 접근해 사격에 성공했소…. 잔잔한 수면에 달빛이 내리듯, 밤하늘에 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기시오!”

그런데 박정희를 암살할 권총은 어떻게 손에 넣어야 하나? 북한에서 지급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홍콩에서 한 차례 실패했던 문세광은 오사카와 고베, 나라, 교토의 파출소를 답사하기 시작했다. 훗날 자신의 범행을 ‘일본인의 개입’으로 위장해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 내 고즈(高津) 파출소는 단층으로 야간 침입이 비교적 쉽다고 판단했다.

7월 18일 새벽 4시, 경찰관들이 취침한 것을 확인하고 뒷문을 파이프렌치로 헐고 침입했다. 미제 ‘스미스 앤드 웨슨(S&W) 38구경 리볼버 칩 스페셜’ 5연발, 일제 ‘뉴 남부 38구경 리볼버’ 5연발 등 권총 2정과 실탄 10발, 혁대에 달린 권총 케이스 2개, 수갑 2개, 경찰봉 1개를 훔쳤다. 그가 범행을 위해 고른 것은 미제 S&W였다.

8월 6일, 문세광은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여권을 들고 김포공항행 대한항공 비행기를 탔다. 권총과 실탄은 일제 트랜지스터 라디오 내부에 감췄다. 비행기는 오후 1시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김포 세관의 16번 검색대에서 X레이기를 통과했지만, 성능 낮은 당시의 기기로는 적발되지 않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면세 조치하게 돼 있어 별다른 검색도 없었다. 만약 세관원이 그걸 한 번 손으로 들어보기만 했더라면 이상할 정도로 무겁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포드 승용차 타고 ‘일본 고위층 행세’

문세광은 서울 조선호텔 1030호 객실에 체크인한 뒤 국립극장을 사전 답사했다. 거기서 8월 15일 열리게 될 광복절 기념식 때 대통령 암살을 기도할 계획이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서울 유흥가와 청평 유원지를 배회하며 주색을 즐겼다. 문세광은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으나, 당시 같은 객실에서 유창한 서울말로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있다는 증언 때문에 이 사람이 ‘중정 요원’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최종 수사 결과 ‘호텔 직원의 단순 착오이거나 문과 무관한 투숙객’이며, 문세광의 국내 행적은 모두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글쎄, 설사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문세광을 비밀리에 도와준 국내 고정 간첩으로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을까?

1974년 8월 15일 오전 7시, 문세광은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국립극장에 갈 것이니 고급 승용차를 준비해 달라, 출발 시간은 9시”라고 말했다. 8시 40분, 대형 포드 승용차가 조선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다. 사실 이것은 호텔에 소속된 고액의 콜택시, 일명 ‘호텔 택시’였으나 밖에서 보기엔 택시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문세광은 미리 운전사에게 차비 1만원을 지불했다. 당시 쌀 1가마를 웃도는 돈이었다.

그러고선 “하차할 때 먼저 내려 밖에서 문을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고위층인 것처럼 보이려는 수작이었다. 차 속에서 문세광은 왼쪽 바지춤에 숨겨둔 권총에 손을 넣어 언제라도 권총 격발이 쉽도록 공이치기를 뒤로 젖혀 놓았다. 그것은 실수였다.

8시 59분, 문세광이 탄 포드 승용차는 아무런 검문을 받지 않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경호실 직원이 배치 완료가 된 것은 9시였으니 1분 일찍 통과한 셈이었다. 정문 근처 경찰 근무자들은 8시 7분에 배치돼 있었으나 ‘범인 탑승 차량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승용차는 국립극장 계단 오른쪽에 멈춰 섰다.

계단을 비스듬히 올라간 문세광은 남문 현관을 통해 로비로 입장했다. 포드 승용차에서 내린 데다 정장에 중절모를 쓴 문세광은 마치 고위층처럼 보였기 때문에 좀처럼 검문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5개월 전 삼일절 행사 때 외국 대사 부인이 핸드백조차 못 갖고 들어가게 했던 과도한 경호 조치 때문에 비난을 받았었다. 그로 인해 행사 경호 책임자가 문책을 받았기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문세광이 보니 가운데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옆으로 긴 의자가 있었다. 거기 앉아 담배를 빼 물고 불을 붙였다. 공연장 로비는 1990년대까지도 흡연이 가능한 구역이었다.

권총 숨기고 비표 없이 착석에 성공

오전 9시 50분, 담뱃불을 끈 문세광은 경호원에게 먼저 다가가 일본어로 말을 붙였다. “우시로쿠 일본 대사와 스즈키라는 사람을 여기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경호원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자기들 입장에서 패전일인 광복절 기념식에 일본 대사가 왜 오나. 어쨌든 경호원은 문세광을 일본 측 고위 인사로 착각했다.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2층 로비에 올라갔다 온 문세광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의자에 앉았다. 10시에 대통령 내외가 식장에 들어섰으나 기둥 뒤에 서 있던 문세광은 총을 꺼내지 못했다.

10시 10분, 문세광은 옆에 있던 경호계장에게 “안에 들어가서 대통령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문세광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왼쪽 문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이 “비표가 없다”며 막아섰다. 문세광은 먼발치의 경호계장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들어가라고 했다”고 말했다. 경찰관은 경호계장의 무표정한 얼굴을 ‘괜찮다’는 뜻으로 인식하고 문을 열어 줬다. 검색도 받지 않은 채 문세광은 권총을 품고 행사장 1층에 진입할 수 있었다. 총체적 경호 실패였다.

안으로 들어간 문세광은 후미 근무자인 순경의 안내를 받아 왼쪽 B좌석군 맨 뒷열 오른쪽에서 세 번째 좌석인 214석에 앉았다. 이날 단상에선 박정희 대통령이 연단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고, 정일권 국회의장, 박종규 경호실장, 육영수 여사, 민복기 대법원장 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진 상황의 연속 사진. /조선일보DB

제1탄: 실수로 자기 몸에 격발

10시 23분, 문세광은 왼쪽 바지춤에 숨겨둔 권총을 빼기 쉽게 배 아래쪽으로 옮기려 했다. 연단에선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고 있었다.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바로 그때, 문세광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잘못 걸렸다. 아까 택시에서 공이치기를 미리 제쳐 놓은 탓에 그만 제1탄이 격발되고 말았다.

“퍽.”

총탄은 문세광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잠깐,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관통상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뛰어나갈 수 있었나? 혹시 신체가 아닌 다른 곳을 쐈고 사건에 연루된 여러 사람에게 ‘이제부터 연극이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은 아닌가?

우선 상식적으로, 만약 그게 신호탄이었다면 잘 들리도록 허공을 쐈어야 마땅하다. 대통령의 경축 연설이 마이크와 스피커를 통해 이어지는 상황에서 무슨 소린지 인식하기 어려운 이 제1탄 오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단상의 커튼 뒤에서 대기 중이던 이상렬 수행과정과 박상범 수행계장도 이 소리를 총성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마이크나 앰프가 잘못돼 난 소리’로 여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관통상’은 관통상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의료진의 상처 감식 결과 제1탄은 대퇴골이나 대동맥, 주요 운동 신경을 건드리지 않은 채 바깥쪽 근육인 연부 조직만 통과했다. 다리를 움직이는 신체 기능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래도 아프지는 않았겠느냐고? 극도의 긴장과 흥분 상태에선 교감신경이 폭발적으로 활성화돼 총상 직후 길게는 수 분 동안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이날 문세광이 달려간 거리는 객석 뒤편에서 무대 앞까지 약 15m, 시간으로는 약 6~7초에 불과했다. 문세광이 입고 있던 바지 안쪽에선 화약 연소 흔적과 탄흔, 혈흔이 확인됐고, 좌석 바닥에서 탄두도 수거됐다. 신호탄? 웃기는 소리다.

제2탄: 박정희를 쐈다… 연설대에 맞았다

제1탄이 발사된 이상 문세광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판단했다.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권총을 빼들었다. B좌석군과 C좌석군 사이 통로로 질주했다. 문세광과 하나 건너 오른쪽 좌석인 B216에 경찰관이 앉아 있었으나 그는 자기 무릎 앞을 스쳐 지나가는 문세광을 보고만 있었다. 하다못해 고함 한 번만 쳤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나중에 ‘경호원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다. B좌석군과 C좌석군 사이 통로 양쪽 가장자리에만 사복 경찰관 12명이 앉아 있었지만 문세광이 달려 나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발 4초 후, 달려가는 문세광을 본 객석에서 “우-!”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소리가 점점 커졌다. 4.5초 시점에서 대통령 뒤쪽에 앉아 있던 경호실장 박종규는 달려오는 문세광을 봤다. 그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6초 만에 문세광은 단상 아래까지 달려갔다. 연설대 뒤의 대통령과는 20.9m의 거리였다. 그 사이에 서울시향 연주자들이 앉은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은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시종…”에 이르고 있었다. 문세광은 대통령을 겨냥해 제2탄을 쐈다.

“탕!”

총탄은 연설대의 왼쪽 상단부에 박혔다. 나무 재질인 것 같았지만 이것은 방탄 연설대였다. 행사 직전에 방탄으로 바꿨다는 의혹은 근거가 없다. 그게 방탄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객석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아악!” “저놈 잡아라!” 제2탄 발사 후 0.5초가 지났고 그 사이에 문세광은 2.75m를 더 전진해 오케스트라 피트에 바짝 다가섰다. 오발 뒤 6.5초, 이동 거리는 14.6m였다. 대통령과 남은 거리는 불과 18.15m였다.

제3탄: 운명을 가른 불발탄

이때 문세광은 제3탄을 쐈다. 그런데 실제 총을 써서 훈련을 해 보지 않은 게 여기서 드러났다. 리볼버 권총의 회전식 탄창은 한 번 당긴 방아쇠를 완전히 원위치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방아쇠를 다시 당기면 공이치기가 작동하지 않은 채 실린더만 회전하는 경우가 생긴다. 3탄은 불발탄이 됐다. 누군가는 이 3탄의 순간이야말로 박정희 대통령에겐 ‘생(生)과 사(死)의 승부처’가 된 것이라고 본다. 만약 이 사건이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었다면 ‘너 반드시 그 순간에 제3탄은 불발탄을 쏴야 한다’고 문세광에게 지시라도 했다는 얘긴가?

제3탄의 불발 직후 연설을 중단한 대통령은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였으나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연설대 뒤로 넘어졌다. 이 모습이 객석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수행과장 이상렬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대통령을 급하게 방탄 연설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때 권총을 든 박종규는 단상 앞쪽으로 뛰어나온 상태였고, 어처구니없게도 몇 초 뒤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단상에서 객석 쪽을 보니 조명이 너무 강해 순간적으로 눈이 부셨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가 저격범 제압보다 요인 보호가 먼저라는 당연한 우선순위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제4탄: 비극의 흉탄

이제 문세광의 시야에선 대통령이 사라졌다. 문세광은 박종규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총구를 연설대 오른쪽 방향으로 미세하게 돌렸다. 그곳 탁자 뒤 의자엔 육영수 여사가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제3탄의 불발 0.5초 뒤, 18.2m 거리에서 문세광은 그 방향으로 권총을 발사했다.

“탕!”

TV 방송 화면에서 육 여사의 머리가 오른쪽 뒤로 비스듬히 젖혀지며 상체가 팔걸이 쪽으로 힘없이 기울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제1탄 후 7초가 흐른 시점이었다. 집도의 최길수 교수의 기록과 법의학적 검토에 따르면, 총탄은 육 여사의 오른쪽 측두부로 들어가 뇌 중심부의 정맥을 파열시켰다. 아래에서 위쪽 방향, 단상 앞에서 뒤쪽 방향으로 향한 궤적이었다. 그날 그 장소에서 이렇게 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문세광뿐이었다.

만약 단상의 경호원이 쏜 것이라면 수평 궤적이거나 위에서 아래로 향했어야 했다. 문세광이 쏜 총탄이 아니라면, 경호원이 단상에서 쏜 총탄이 단상 아래로 갔다가 회전해서 다시 단상 위로 올라왔다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장소의 저격수가 쏜 총탄이 문세광의 위치로 내려갔다가 다시 단상으로 올라갔다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마법의 탄환’이 아닌가? 이후 제4탄의 탄두를 찾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세광이 그 탄환을 쐈다는 명백한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5탄과 오발탄

이때 경호원 한 명은 심지어 육 여사의 뒤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공무원이 용렬할수록 용감한 시민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다시 총을 쏘려는 문세광을 독립유공자석인 C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서대문세무서 재산세계장 이대산이 오른발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문세광은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제5탄을 발사했다. “탕!” 총탄은 높이 올라 단상 뒤편의 대형 태극기를 뚫었다. 제1탄 오발 7.5초 뒤, 18.85m를 움직인 끝에 문세광은 앞쪽 열 근무 경찰관에게 제압당했다.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이 튀어 시향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의 왼뺨에 맞아 피부가 2㎝가량 찢어졌다.

당시 녹음을 들어보면 제1탄에서 17초가 지난 뒤, 경호원이 연단 뒤의 대통령에게 “가만 계세요”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19초엔 “가만히 계세요”라고 말한다. 20초에 대통령은 “잡았니?”라고 묻고, 21초에 “예”라는 답변이 나온다. 그리고 22초에 경호원이 이렇게 말한다. “사모님이….”

그리고 23초. 다시 “탕” 소리가 들린다. 객석 합창단석에 있던 성동여자실업고 2학년 장봉화가 총탄을 맞았다.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상의 경호원이 쏜 오발이었다. 장봉화는 숨졌다.

이날 더 이상 사상자는 없었으므로 총성을 집계하는 것은 이 시점까지만 유효하다. 이때까지 발사된 탄환은 다음과 같이 모두 6발이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이 중 제3탄은 총성이 나지 않았으므로 총성은 모두 다섯 번이 들려야 맞다. 그러나 ‘6~7발이 들린다’는 말이 계속 제기돼 음모론을 키웠다. 하지만 1970년대 실내 극장 특유의 반향음, 철제 의자가 엎어지는 소리, 마이크 노이즈 등이 총성과 겹쳐 왜곡됐을 뿐, 실제 총격음은 다섯 번이 맞다는 정설을 뒤집을 근거는 없다. 국립극장 단상과 객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문세광이 아닌 다른 암살자(들)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언제까지 의심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

객석에 있던 독립운동가 유족 탁금선이 뛰어 올라와 육 여사를 부축했고, 김정렴 비서실장, 양택식 서울시장이 황급히 달려와 이송을 도왔다. 육 여사가 이송된 지 3분 뒤, 놀랍게도 박 대통령이 다시 연설대 앞에 섰다.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는 30초 정도 더 연설을 이어갔다. 연설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이것은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하나는 공범이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국민 앞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역시 대담하고 강단이 있는 지도자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공범이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VIP가 다시 나타난 것은 경호상의 큰 실책이라는 것이다. 둘 다 상관없이 이것은 엉뚱하게도 ‘박정희는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으로도 연결된다.

연설을 마친 박정희가 돌아설 때, 그의 눈에 잡힌 것은 바닥에 떨어진 아내의 고무신과 핸드백이었다. 대통령이 묵묵히 몸을 숙여 그것을 줍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치는 이들이 많았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육 여사는 그날 오후 7시 무렵 끝내 숨졌다. 집도의는 “꼭 살렸어야 했는데… 5㎜만 비켜 갔어도…”라며 애통해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그날 개통된 지하철을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몇 번을 신기하게 타고 다녔는데, 저녁이 돼서 육 여사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성적으로는 믿기 어렵지만 ‘그날 하늘이 갑자기 붉게(또는 주황빛이나 보랏빛으로) 변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실제로 대단히 많다. 누군가 이 얘기를 꺼내면 여기저기서 “나도 봤다!” “나도!”라는 말이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과 육영수 여사의 서거를 보도한 1974년 8월 16일 조선일보 1면.

“미안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속았습니다”

중앙정보부 조사실로 압송된 문세광은 처음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법무비서관이던 김기춘 검사가 투입돼 “당신이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에 나오는 자칼이 아니냐”고 묻자 “내가 바로 자칼입니다. 나는 공산 혁명을 이룩하려는 한 수단으로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념 서적은 장식용이었어도 첩보 소설은 읽었던 모양이다. “그런 사람이 왜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있느냐”고 했더니 그때부터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 경찰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수사에 대해 대단히 비협조적이었다. 이것은 한 해 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었다. ‘문세광이 미키코를 만난 다방이 어느 지역에 있다는데 맞는가?’란 질문에도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식이었다. 한국 수사기관은 끝내 요시이 미키코도 김호룡도 조사하지 못했다. 미키코는 일본에서 여권 부정 발급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 3개월의 하나마나한 처벌을 받았고, 김호룡은 증거 불충분이라며 석방됐다.

그러나 그런 일본 경찰도 한국의 수사 결과를 부인하지는 못했다. 최근 김기춘은 언론 인터뷰에서 “문세광이 권총을 훔친 파출소 내 상황과 케이스를 던진 강물 위치 등을 상세하게 진술했고, 이 내용이 전달된 뒤 일본 경찰은 문세광이 강에 버린 권총 케이스를 찾아냈다”고 했다. 문세광의 진술이 사실과 부합한다는 것을 일본 측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수사 초기에 문세광은 수사관에게 이런 질문을 곧잘 던졌다고 한다.

“바깥에선… 아무 일도 없습니까?”

그건 ‘민중 봉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김호룡 같은 조총련 인사들은 ‘저격만 하면 남조선 민중들이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라고 그에게 세뇌교육을 했기 때문이었다. 문세광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선 ‘사형을 받더라도 7~8년 모범수로 살면 석방될 것’이라는 쓸데없는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문세광은 8월 24일 검찰에 송치됐다. 9월 12일 기소됐고, 10월 19일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바로 항소했으나 11월 2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됐고,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돼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은 12월 20일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됐다.

문세광은 “암살 목적으로 고국의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민족적 차별을 겪다 보니 공산주의가 아니면 이 소외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수기를 썼다. 유흥가만 돌아다녔으니 푸른 하늘 말고는 별로 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사형 직전엔 이런 최후의 말을 남겼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에 대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그들(조총련과 북한)에게 속았습니다.”

‘음모론’은 일본에서 시작돼 북한을 거쳤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나온 것은 사건 직후 일본에서였다.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일본의 반한 감정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일본의 주간 아사히 등은 그때 미 “총성이 7~8발 울렸고, 경호원의 오발에 대통령 부인이 맞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反)유신 여론을 탄압하려는 국면 전환용”이라는 주장도 이미 이때 나왔다. 한국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얘기였다.

이것이 1987년 6.29 선언 이후 한국에 수입돼 일부 주간지 등을 바탕으로 ‘육 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맞은 게 아니다’는 주장으로 비화됐다. 이 음모론 중에는 무대의 오른쪽 뒤편에서 불빛이 보이는 사진을 놓고 ‘이 사람이 진짜 저격범이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육 여사가 실제 총탄을 맞은 방향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그건 당시 중계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는데도 이런 보도를 했다.

1980년대 말 일부 주간지에서 쏟아져 나오던 문세광 사건의 억측성 보도 중 하나. 그런데 몇 년 뒤 북한 영화의 설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음모론이 하도 집요하게 나오다 보니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얘기냐, 박정희가 자기 아내를 죽이기라도 했단 말이냐”라며 여기저기서 울분을 터뜨렸다. 1980년대 말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음모론을 보도하는 매체들은 끝내 ‘그 말’만은 좀처럼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자기 아내를 죽이고 문세광의 소행으로 위장했다’는 그 말.

마침내 ‘그 말’을 자기들 마음대로 내뱉은 곳이 있었다. 북한이었다. 1992년 시리즈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이 사건을 묘사했는데, 연설대의 박정희가 뭔가 신호를 보내고 나서 문세광이 계단을 달려나오며 총격을 시작하고, 무대 오른쪽 뒤편에서 기분 나쁜 인상을 지닌 의문의 인물이 총을 쏴 육 여사는 등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여기서 나오는 내레이션은 이렇다. “박정희 본인은 5·16 군사정변 때 생명과 출세의 은인인 장도영을 체포·처형하려고까지 했으며, 8·15 광복절 기념일 때에는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온 뒤) 이처럼 자기 처를 제물로 바쳐 뒤흔들리는 독재 정권을 유지한 살인 악마이다.”

1992년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을 묘사한 장면.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단상의 육영수 여사가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연설대에 선 박정희 대통령이 뭔가 신호를 보낸 뒤→문세광이 총격을 시작한 사이 무대 오른쪽 뒤편에서 의문의 남성이 총을 겨누더니→등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가 쓰러진다.

사건 당시 서울경찰청 감식계장이었던 이건우는 1989년 ‘육 여사를 쏜 사람은 문세광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그는 문세광의 불발탄이 제3탄이 아니라 제5탄으로 알고 있었고, 이미 호텔 콜택시라는 사실이 밝혀진 포드 승용차에 대해서도 ‘그런 엄청난 승용차가 어디서 나왔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등 기초적인 사실관계 파악에 허점이 있었다.

그 후로 음모론은 그 전만은 못했으나 잊힐 만하면 간간이 언급됐다. ‘그알’도 ‘꼬꼬무’도 한 번씩 다뤘다. ‘박정희가 여성 편력 때문에 제 마누라와 사이가 나빠져 결국 자작극을 벌여 아내를 죽였다’는 얘기는 너무 막장 스토리여서 사람들이 잘 믿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는지, 이제는 ‘한일 협정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 지하철을 두 배 비싸게 사 왔는데,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나빠져 그 일본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문세광 사건을 조작해 일본 총리가 사과하러 오는 상황 속에서 한일 관계가 개선되리라고 기대했던 음모’라는 상당히 복잡한 이유를 내거는 음모론도 있다.

한일 협정과 지하철 개통과 같은 박정희 정부의 업적을 스리쿠션 식으로 돌려까기를 하려는 이 음모론에 대해 굳이 답변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이렇게 답변할 수 있다. ①그건 대일 청구권 자금과 관련 없는 1972년 한·일 정부가 합의한 별도의 유상 차관이었다. ②지하철 리베이트 사건과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은 ‘저격 미수 사건’과 ‘지하철 개통’이 같은 날 일어났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③문세광의 저격 이후 한일 관계는 좋아지기는커녕 외교 단절 직전까지 갔다. 박 대통령은 특사로 방한한 일본 자민당 부총재(전 외상)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에게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 청년이 한국 경찰 총으로 일본 황후를 살해했다면 일본은 한국 정부에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냐”고 격하게 몰아붙였고, 시나 특사는 돌아가면서 “내 평생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며 푸념했다.

무리한 가정(假定)이며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만약 당신이 박정희인데 정말 자기 아내를 몰래 살해할 마음을 먹었다고 생각해 보자. 자신의 눈앞에서 총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굳이 연출해서 죽인다? 많은 사람이 객석에 앉아 있는 대형 극장에서(당시 국립극장의 객석 수는 1563석이었다), 더 많은 사람이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현장에서? 더구나 그 허술한 경호실과 중정을 믿고서?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는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총격 직후 연설대 뒤에서 마치 당황한 것처럼 경호원과 긴박한 대화를 나누고, 아내의 운구차를 붙잡고 침통한 척 오열하거나 사람 없는 데서 통곡하는 연기까지 했다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먼저 가슴에 손을 얹고 이런 자문(自問)을 해보기 바란다.

“나는 과연 인간이 맞는가?”

1974년 8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정문에서 육영수 여사의 운구차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당신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미안하다”?

북한은 다른 테러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심지어 북한군이 저지른 것이 너무나도 명백한 1976년 8·18 도끼 만행 사건 때도 김일성은 “나는 몰랐다”고 했다. 문세광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기밀 해제된 구 동독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74년 10월 25일 신임 주북한 소련 대사 글레브 크리울린에게 신임장을 주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뺌인 건 맞는데 여운이 좀 묘하다. “테러범 문세광은 아마도 남조선을 지지하는 한인 단체인 민단의 좌익에 속합니다. 이들은 김대중을 추종하는 자들이에요.” 이 발언은 2020년 성상환 서울대 교수에 의해 알려졌다.

 

그리고 북한의 ‘자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외신 기사가 하나 있다. 2002년 9월 13일 일본 지지(時事)통신의 보도다. 그해 5월 김정일이 평양을 방문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신의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급자들이 관련됐으며 나는 사전에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는 2007년 출간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당시 김정일이 사과한 것은 1968년 1·21 사태에 대해서였다고 했다(198~199쪽).

기자의 생각은 이렇다. 문세광은 이념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은 채 시류에 휩쓸려 마치 ‘진보’의 길을 걷거나 ‘신념’이 투철한 것처럼 자신과 남을 속여가며 ‘혁명’을 패션처럼 소비하고 ‘감성’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 얼치기(들)이 얼마나 선을 넘는 엄청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얼마나 역사에 커다란 해악을 남길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본과도 같았다.

 

육 여사 서거 이후의 정국은 정권에 유리하게 전개됐나? 천만에. 반(反)유신 세력은 결코 궤멸되지 않았던 반면, 유신 정부는 전보다 훨씬 거칠어졌고, 중정과 경호실의 수장으로 몹시 위험한 인물들이 들어왔으며, 끝내 5년 뒤 박정희 정부는 최후를 맞게 된다. 문세광의 잘못만은 아니겠지만, 한 번 해외발(發)로 만들어진 음모론이 몇 번의 우회를 거쳐 얼마나 조악한 형태로 재생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소름 끼치는 일이다.

조선일보.조선닷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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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첫날  해비치 리조트의 야경입니다.

무더운 여름은 어느덧 건너가고 서늘한 가을밤

제주도 해비치 리조트 가을밤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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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학교 건물은 1924년에 세운 것으로, 一자형의 구성이다. 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Arch) 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직선을 강조하였으며,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창을 만들어 놓았다.

현관·복도·난간·기둥들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일제강점기 전반기 건물이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1907년에 세워졌으며, 당시 이름은 인천공립보통학교였다.

1933년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 1938년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창영공립국민학교,

광복 후 창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3·1 운동 당시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한 전통 깊은 곳이기도 하다.

 

옛 학교 건물은 1924년에 세운 것으로, 一자형의 구성이다. 벽체 윗부분은 화강석으로 아치(Arch) 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몄다.

 

좌·우 대칭면에 넓은 창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직선을 강조하였으며, 지붕에는 그 아래쪽 방을 밝게

하기 위한 지붕창을 만들어 놓았다

. 현관·복도·난간·기둥들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일제강점기 전반기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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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몽골 국경도시 캬흐타·알탄불락
"몽골에는 정해진 길 없어 가는 곳이 곧 길"
시베리아·몽골 철도·亞고속도로 교차지

바이칼의 바람과 끝없는 초원의 길

러시아 부랴트 공화국 최남단의 캬흐타(Kyakhta)에서 몽골 국경 도시 알탄불락(Altanbulag)을 넘어 울란바타르로 향하는 길은 러시아와 몽골의 접경 지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간이다.

바이칼 호수 남쪽과 부랴트 지역은 겨울철 바람이 강하고 기온이 낮다. 국경으로 향하는 고갯길에서는 눈발과 강풍 때문에 차량 이동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몽골인 가이드는 “몽골에는 정해진 길이 없다. 가는 곳이 곧 길이 된다”고 말했다. 울란바타르까지 이어지는 주요 도로는 포장돼 있지만, 초원 지역에서는 차량이 기존 바퀴 자국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캬흐타와 알탄불락은 단순한 국경 도시가 아니다. 러시아와 몽골, 중국을 잇는 교역과 이동의 거점으로 수백 년 동안 기능해 왔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연주

‘차의 길’의 핵심 거점

캬흐타가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계기는 1727년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캬흐타 조약이었다. 이 조약을 계기로 양국의 국경과 교역 질서가 정비됐고, 카흐타는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대표적인 육상 무역 거점으로 성장했다.

중국에서 생산된 차와 비단, 직물 등이 몽골 초원을 거쳐 북쪽으로 이동했고, 러시아에서는 모피와 각종 상품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 교역로는 훗날 ‘차의 길(Tea Road)’로 불렸다.

국경 남쪽에는 중국 상인들이 활동하던 교역촌 ‘마이마이청(買賣城)’이 형성됐다. 오늘날 알탄불락의 전신이다. ‘알탄불락’은 몽골어로 ‘황금의 샘’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경을 확정해 가는 과정에서 몽골계 주민들의 생활권이 나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러시아의 부랴트인과 몽골인의 역사적 연원을 이해하는 데 이 국경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몽골 현대사의 주요 무대

알탄불락은 몽골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다. 1921년 몽골 혁명 세력은 이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같은 해 3월 몽골 인민당과 임시정부가 조직됐고, 담딘 수흐바토르가 이끄는 몽골 인민군은 중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캬흐타 일대를 공격했다.

이후 몽골 혁명 세력은 소련 적군의 지원을 받아 울란바타르의 전신인 니슬렐 후레로 진격했다. 이 과정은 몽골의 정치 체제가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알탄불락은 청·러 교역의 거점에서 20세기 초에는 혁명과 독립 과정의 주요 무대로 성격이 바뀌었다.

러시아와 몽골을 잇는 주요 육로 관문

오늘날 알탄불락은 몽골 북부 셀렝게주에 속해 있으며, 울란바타르에서 북쪽으로 약 340㎞ 떨어져 있다. 러시아 캬흐타와 바로 맞닿아 있는 대표적인 육로 국경 관문이다.

이곳을 통해 러시아와 몽골을 오가는 사람과 화물이 이동한다. 몽골 정부는 최근 알탄불락 검문소의 처리 능력을 확대하며 국경 통과 인프라를 정비하고 있다.

철도 노선은 별도다. 몽골종단철도는 알탄불락을 직접 통과하지 않고, 인근 몽골 수흐바타르와 러시아 나우시키를 통해 국경을 넘는다. 이 철도는 울란바타르를 지나 남쪽 자민우드와 중국 얼롄하오터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도로에서는 카흐타–알탄불락이, 철도에서는 나우시키–수흐바타르가 러시아와 몽골을 잇는 대표적인 북부 관문 역할을 한다.

알탄불락에는 자유경제구역도 지정돼 있다. 몽골 정부는 이곳에 무역·물류·가공 산업과 관광 기능을 유치해 북부 경제 거점으로 육성하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달라진 국경 풍경

이 국경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부분 동원령을 내렸을 당시에는 징집을 피하려는 러시아인들이 몽골로 이동하면서 알탄불락 국경 검문소에 이용자가 몰렸다.

평상시에는 화물차와 여행객이 주로 오가는 곳이지만,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면 사람들의 이동 경로로도 활용되는 셈이다.

러시아와 몽골 사이의 교역에서 에너지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몽골은 러시아에서 상당량의 석유 제품을 수입한다. 반면 몽골 수출은 중국 의존도가 훨씬 높다. 석탄과 구리 등 주요 광물자원의 대부분이 중국 시장으로 향한다.

이 구조는 몽골의 경제와 외교가 러시아와 중국 양국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몽골은 러시아와 달리 초원위에 목조 건축물과 게르라 불리는 천막집들이 들어선 풍광이 자주 보인다.방목 가축들을 위해 울타리를 설치한 모습도 보인다. /사진=정병선 기자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몽골

몽골은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국과만 국경을 맞댄 내륙국이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의존도가 높다. 몽골 수출의 80% 이상이 중국으로 향하며, 석탄·구리 등 광물자원이 주요 품목이다. 러시아는 석유 제품과 각종 상품의 주요 공급국이다.

러시아 역시 몽골을 중요한 남방 연결 통로로 본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보내는 대형 가스관 구상도 이런 관계를 보여준다. 이 사업은 오랫동안 ‘시베리아의 힘-2’로 불렸으며, 몽골을 통과하는 노선이 논의돼 왔다.

중국 입장에서 몽골은 광물자원의 주요 공급처이자 북방 경제 회랑의 일부다. 중국은 남부 자민우드 국경 등을 통해 몽골과 대규모 교역을 하고 있다.

몽골 입장에서는 두 나라 모두 경제적으로 필수적이지만, 어느 한쪽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은 외교적 부담이다.

몽골의 ‘제3의 이웃’ 외교

이 때문에 몽골은 ‘제3의 이웃(Third Neighbor)’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국경을 맞댄 러시아와 중국 이외의 국가들과 외교·경제 관계를 확대하는 전략이다. 미국, 일본, 한국, 유럽연합(EU) 등이 대표적인 대상이다.

몽골은 러시아·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 협력을 확대해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려 한다. 경제적 의존도를 분산하고, 투자와 안보·외교 협력을 다변화하려는 목적도 있다.

따라서 캬흐타–알탄불락 국경은 몽골의 지정학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과거에는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의 무역 거점이었고, 20세기 초에는 몽골 혁명의 무대였으며, 지금은 러시아와 몽골을 잇는 교역·물류 통로다. 동시에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몽골이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캬흐타와 알탄불락의 국경은 단순한 행정 경계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는 교역과 군사·정치적 경쟁의 접점이었고, 현재는 에너지와 물류, 인적 이동이 집중되는 전략적 통로다.

이곳을 지나 울란바타르로 향하면 몽골의 지정학적 현실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북쪽의 러시아와 남쪽의 중국에 경제적으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해 균형을 확보하려는 것이 현재 몽골 외교의 기본 방향이다.


울라바토르 교외 테를지 국립공원에 있는 징기스칸 기마상. 몽골제국의 800주년을 기념해 2008년 세워졌다. 

 


#정병선의 나는 오지인이다캬흐타알탄불락러시아몽골바이칼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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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리 성냥 박물관..

배다리 성냥 박물관을 다녀오게 되었다.

박물관은 인천 제물포구 금곡로 19번지에 자리 잡은 아주 적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자리 잡은 자리는 조선인촌 주식회사가 있던 자리로 성냥의 역사와

제작 과정. 바다리 성냥 공장과 생활사를 전시하고 역사적인 배경을 해설사

에게 게 자세히 들을 수도 있는 곳이다.

 

작은 규모이지만 성냥이라는 소재를 통해 기술사와 지역산업, 생활문화를

함께 살피는 구성이 특징이에요.

어린이용 안내 자료와 성냥 관련 도장도 마련돼 있어 가족 관람에서도 활용

도가 높습니다.

 

 
건물의 역사
1917년 조선인촌주식회사, 1960년대 건축, 2016년까지 동인천우체국, 2019년 개관
전시 흐름
 
성냥의 발생, 국내 도입, 제작 과정, 생활 속 변화
주요 전시품
 
초기 성냥, 시대별 성냥갑과 라벨, 휴대용·가정용 성냥
생활사 공간
 
금곡다방 재현, 성냥탑 쌓기 체험
지역 이야기
배다리 성냥공장, 공장 노동자, 성냥갑 작업 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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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 = 오현주 기자]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년) 시해 사건(을미사변)과 관련해 궁금한 인물이 두 명이다. 명성황후의 침소(건청궁·乾淸宮) 위치는 물론, 황후의 얼굴조차 모르는 일본의 낭인들에게 길 안내를 해준 조선인은 도대체 누구이고, 이 자를 응징한 이는 또 누구인가. 

경복궁 깊숙이 위치한 건청궁까지 무리의 앞장을 선 이는 우범선(禹範善·1857~1903년)이란 훈련대장이다. 그는 세계적인 농학자 우장춘(1898~1959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우범선은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근대화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친일 개화파’였다. 1895년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에 신식 군대인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소령급)에 임명됐다. 

같은 해 10월 8일 새벽, 일본군 수비대, 일본 공사관원, 낭인 등이 경복궁으로 돌진했다. 이때 우범선의 훈련대가 광화문과 신무문 등의 초소를 점거하고, 왕실 시위대(侍衛隊)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일본 낭인들은 우범선의 안내를 받아 건청궁까지 거침없이 침투해 자고 있던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은 우범선이 황후의 시신 유기 및 은폐에도 협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과 함께 시신을 녹원 숲으로 옮겨 기름을 붓고 소각하는 과정에 직접 관여했다. 사후 검증에서도 “황후의 시신을 태운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고종·명성황후 합장묘 홍릉.
◇이토 히로부미가 황후 제거 지시

을미사변은 일본 정부의 지시로 저질러진 참극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수뇌부가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지시했고, 미우라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우범선을 행동대장으로 내세웠다. 갑오경장 이후 일본 세력이 커지자 명성황후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던 일본 측으로선 명성황후가 눈엣가시였다. 

우범선 역시 나름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 무렵 친일 개화파 군인들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고, 훈련대 존폐 문제도 거론됐던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 내각이 무너지자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이름을 바꾸고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 살았다. 일본은 우범선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줬다. 매달 초등 교사 봉급 수준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자녀 학비도 대줬다. 

고종은 우범선·이두황·조희연 등 을미사변 주동자들을 ‘을미역적’으로 규정하고 비밀 암살단을 지속적으로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중 우범선을 처단할 인물이 나타났다. 고영근(高永根·1853~1923년)이다. 평안도 상민 집안 출신의 그는 민비의 친척인 민영익의 집사였다.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또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간대회 ‘만민공동회’ 회장을 맡는 등 독립협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 충성했다. 

고영근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진짜 목적은 명성황후의 원수인 우범선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한 채 우범선에게 접근해 거처할 집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우범선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영근에게 자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집을 소개해줬다.

◇고종, 日에 고영근 석방 요청 


고영근은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고영근은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는 윤효정 등 다른 조력자들과 함께 기회를 노리던 중 1903년 11월 24일, 우범선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음식을 대접하며 방심하게 만든 뒤 숨겨둔 단도와 몽둥이로 우범선을 덮쳤다. 우범선은 그 자리에서 목과 가슴에 칼을 맞아 숨졌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8년 만에 이루어진 역사적인 처단이다. 

고영근은 거사 직후 도주하지 않고 일본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그는 경찰 조사와 일본 법정에서 당당하게 “나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국모를 살해한 국가의 역적 우범선을 대한제국 황제의 신하로서 처단한 것”이라고 외쳤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언론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법원은 고영근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고종의 강력한 외교적 석방 요청과 사면 운동 덕분에 감형되어 징역형을 살다 1909년에 석방됐다. 

귀국 후 고영근은 남은 생을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남양주 홍릉(洪陵)의 능참봉으로 보냈다. 능을 지키는 한편으로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홍릉에 ‘대한제국 고종 태황제 홍릉’이라고새긴 비석을 몰래 세우기도 했다.

한편 우범선은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酒井仲)와 사이에 우장춘을 낳았고,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에 피살당했다. 

우장춘은 한국에 ‘씨 없는 수박’을 소개하는 등 세계적인 유전육종학자가 됐다. 그는 아버지가 지은 역적의 죄를 속죄라도 하듯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와 채소 종자 자립을 이루며 대한민국 농업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출처 : 백세시대(https://www.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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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믹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 풍경.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간진 하고 있는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은 전시물을 만

나기 전에 박물관을 들어서면은 압도적인 풍수지리에 건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변의 풍경을 압도적으로 볼 수가 있는데 한낮의 가을 햇빛은 아직도 따갑

지만은 남산을 바라보면서 계단을 올라서면은  시원한 풍경과 시원한 바람

이 등판의 땀을 시키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석기시대의 소박한 손도끼부터 삼국 시대의 화려한 금관. 고려시대의 청

자.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백자와 근대의 사진을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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