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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과 명소 탐방.

문경 새재 옛길 을 걸어본다 3.

by 북한산78s 201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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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새재 옛길을 걸어본다. 3

제1관문을 지나고  kbs 영화세트장을 지나면은 본격적인 새재의 부드러운 흙길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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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불됴심표석은 원추형 화강암자연석에다 산불됴심 이라는 순수한 한글로 적혀있다는 것이다.

 한자를 쓰던 시대에 순수한 한글로 적어놓은것이 특이 한것 같다.

 

 

 

 

 

 

초겨울로 들어선것 같다. 웅덩이 물이 얼은것을 볼수가 있다.

 

 

한여름에는 물레방아가 상류 조곡폭포에서 내려온 물로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아가는것이

멈추어버렸다.

내년  봄이되면은 물레방아가 돌아 가는것을 볼수가 있을 것 같다.

 

 

위에서 떨어진 물로 고드름이 달려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조곡폭포. 산불됴심비에서 약 200여미터 올라가면은 40여미터높이의 3단폭포가 있다.

자연적인 폭포가 아니고 인공폭포니 내년봄에나 폭포의 물소리를 들을수가 있을 것같다.

폭포가 가동되면은 물소리가 얼마나 우렁차게 내려오는지 아주 장관임을 볼수가 있다.

고드름이 제법 크게 달려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제 2관문을 들어서기전에 오른쪽으로 주흘산을 등산하는 산행로가 있다.

주흘산은 오르는등산로는 여러군데 있지만은 보통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 한다.

주흘산을 산행하는 산행 등산로...

 

조선조 에 왜군이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은 조정에서왜란이 끝난후에 이곳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막지못한것을 매우후회 하였다고 한다

조령은 좌로는 조령산과능곡산.백화산이있고 우로는 주흘산.부봉.마패봉이 있어서 전부천혜의 산악지대인대다가 좌우가 절벽지대

로 되여있어서 적은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을수가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조령이 뚫리면은 충주로부터 한양으로 통하는 뱃길이라 문경새재는 나라의 관문과 같았다.

그런 충주를 지키려면은 문경 조령애서 적을 반드시 막아야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진왜란때에 공을 세운 의병대장 신충원을 파수관으로 임명해서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제2관문 조곡관이다.
그뒤로 문경새재의 세고개에 관을 지었다고 한다.

제 3관문 조령관.응암고개에 제 2관문. 조곡관. 초곡에 제 1관문 주흘관을 지은것이다.


 

 

 

 

 

 

 

 

 

 

 

 

 

 

 

-임진왜란 때 왕은 야인(野人)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 장군를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에 임명하였다.
이에 신립 장군은 농민군 8,000명을 이끌고 문경에 내려와서 제1진을 제1관문에, 제2진을 이곳에 설치하였던 곳이라서 이진터(二陣址)라 하는 곳이다.


왜장 유니나가(小西行長)가 18,0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정탐할 때였다.
함께 조정에서 내려온 김여물과 패전하여 온 이일 장군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천혜의 요충지로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의 거친 성격에다가 왕년에 그의 철기(鐵騎)로 야인을 무찌르던 것을 과신하고 듣지 않았다.


전투에 경험이 없는 농군이라 여차하면 탈영을 하는 자가 많아서 사지(死地)에 갔다 놔야 결사 항전할 것이라는 것이 신립 장군의 오판(誤判)이었다.
신립장군은 충주 달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중과부적으로 그만 패전하고 부하들과 함께 남한강 달천 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지만, 그의 고집으로 인하여 한양을 빼앗겨 선조는 신의주까지 몽진하여야 했고 죄 없는 수많은 충주 시민이 죽어간 것이다.


새재에서 퇴진하면서 신립장군은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 달천(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 초병이 정탐하러 와서 보니 조선초병이 지키고 있는데 아뿔싸! 조선 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혜의 요새를 넘었다는 그 역사적인 비극의 장소가 바로 새재다.

 
이와 연관된 여자를 유난히 좋아하였다는 신립 장군에게 이런 일화도 전해 온다.
새재에 진을 칠까, 아니면 탄천에 배수진을 칠까 망설이던 신립 장군의 꿈에 소싯적 장군을 사모하다가 원한을 품고 자결한 처녀의 원귀기 나타나 권하는 것이었다.


“신 장군님, 대명을 받들어 왜적을 격멸하러 오셔서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려 하시나이까. 생각하신 대로 충청도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시면 크게 대승리리다.

 

이진터를 지나니 밤사이 얼었던 땅이 녹아서 땅이 질어서 등산화에 흙이 달라붙어서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길을 걸으니 예전에 시골 고샅을 걸으면은 검정 고무신에 진흙이

달라붙어서 신발이 벗겨졌던것이 생각이 나는것은 웬일 일까.

 

 

 

이지점이 낙동강의 최초 발원지라고 한다.

 

 

이웅덩이가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한다. 아주깨끗하고 맑은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에서 시작한물이 흐르고흘러서 영남 지방을 구비구비 흐르면서 젖줄이되여서

경남 김해평야를 젖시면서 부산앞바다로 흘러 갈것이다.

 

책바위.

 

 

제 3관문에 드디여 도착을 하게된다.

제 1관문에서 6.5킬로인데 쉬엄 쉬엄 오르다보니 2시간 가까이 시간이 소요된것 같다.

 

제 3관문은 해발 650미터로 백두대간 상줄기에 있기때문에 더욱 정감을 느낄수가 있는것 이다.

전에 백두대간을 종주할적에 이곳에서 문경으로 하산을 한적도 있고 조령산과 주흘산을 연계산행을

할적에도 쉬어가는곳이였기때문에 기억이 새롭기만 하다.

 

제 3관문을 쌓을적에 발견 했다는 조령약수도 아직도 물이 마르지않고 샘이 솓아 오르는것을 볼수가 있다.

조령산 족으로는 초겨울이라 산불때문에 입산금지 플랭카드가 붙어 있다.

산불 감시하는분이 이곳에서 지키고 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11월은 초겨울로 진입 하는계절이기 때문에 산행을 금지하는듯 하다.

 산불방지때문에 입산금지 를 하고 있다.

백두대간 사의 능선이지만은 해발 650미터로 맘만한 높이가 아니다.

 

 

 

 

문경새재 1관문에도 비석이 설치되여 있고 제 3관문에도 비석이 설치되여 있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어원은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억새) +‘재’(고개)에서 왔다는 설, ‘새(鳥)’도 날아서 넘기 힘든 ‘재’(고개)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 + 재(嶺)’라고도 하였다.
또 다른 설로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이화령)보다 ‘새(新)’로 된 +‘재(고개’)라 해서 ‘새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경상도 지방을 영남(嶺南)이라고 하는데 그 '嶺'은 새재를 말하는 것으로 ‘조령(鳥嶺)의 남쪽’ 지방이라 해서 생긴 말이다.

조령은 요즈음 새로 조경공사가 한창인것 같다.

 

내년봄이면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여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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