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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과 명소 탐방.

2011년 11월 25일 인천 자유공원을 찾아서....

by 북한산78s 2011.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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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 맥아더장군동상.

 한국전쟁후에 인천상륙작전의 7주년 기념을위에 맥아더장군동상을 제막하였고

 공원이름도 자유공원으로 변경하였다고한다.

 

 2011년 11월 25일 자유공원을 찾아본다.

어릴적에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왔었는데 자유공원 맥아더장군동상을보고 감격을하였고

6.25동란후 베이비붐세대로 50대중반을훌쩍넘어버렸서 자유공원을 찿으니 그엣추억의

기역이 아직도 새록새록 주마등처럼 생각이난다.

 

인천으로 주거지를 옮긴후에도 여간해서 자주찿아보기가싶지가않다.

요즈음젊은이들은 놀이거리 볼거리가 무척많아서 데이트로 갈곳이무척이나

많지많은 우리세대는 고작가는곳이 자유공원에올라와서 인천항도크와 월미도를

보는것이나 극장을가서 영화를보는것이 연인들의 데이트코스였던것이다.

 

[ 자유공원의 역사 ]

 

인천의 자유공원은 1888년으로 탑골공원보다 9년 일찍 응봉산 일대에 조성되었다. 응봉산은 인천이 개항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발 69m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공원이 만들어진것은 개항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조계를 설정한 이후 부터이다.

 

1883년 청국과 일본이 선린동일대에 조계를 설정하자 영국과 미국,독일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 14만평을 쪼개 각국조계로 만들었다. 이 조계를 A,B,C,D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D지구로 분할된 곳이 현재의 자유공원으로 부르는 각국공원이다.

 

각국공원은 일제시대때에는 서공원으로 불렸는데 광복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바뀌었다가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나라의 힘이 이땅에 미치는가에따라 공원이름도 계속 바뀐것이다.

 

각국공원이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88년 당시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이 이곳의 땅을 구입해서 서양식 직원사택을 짓고 사교틀럽인 제물포 구락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공원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의 측량기사 사바친인데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항구가보이는 언덕공원'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공원조성을 일본식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천 시민의 휴식처가 된 자유공원은 별명이 있는데 오정포산 또는 오포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귀한 때라 시간을 알수없어 생활에 불편을 겪자 인천 기상대에서 1908년 자유공원꼭대기에 설치한 대포를 쏘아 낮12시를 알렸는데 정오를 알린다고 해서 오포(午砲)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1924년에는 시간이 15분늦는 사고가 생기고 오포를 쏘다가 손에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생기자 오포제도가 폐지되고 홍예문 언덕에 세운 철탑 소방망루에서 사이렌으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공원광장에는 월미방향으로는 한미수교100주년을 맞이하여서제작된기년탑이

 웅장한모습으로자리를틀고있어 묘한공간감을주고있는데 멀리서그냥지켜보지말고

 가까이다가가서 그내부를 볼것을 권장한다.

 

 

 

 

 

 

 자유공원을 찾은중국인 관광객들.

 사진으로는담지못하였는데 차이나타운밑도로에 중국인들이타고온 관광버스

 가 10여대가 대기한모습을 보게된다.

 한국인들이 중국을 아직도많이 다녀오고 하지만은 요즈음 중국인들이 무척

 우리나라를 찾는것같다.

 이사람들이 돈을 많이써서 경제에 도움이 되였으면한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아래에는 연오정이나 석정루등이 있어서 오가는이들이

 지루하지않게 하는데 석정루에 올라보면은 인천내항과 석양을 멋있게 조망을

 할수가있다.

 

 

 

석정루를 올라가는계단벽에 쓰여진 아름다운(?) 발자취...

 

 

 

 

 홍여문 무척오래된문이다.

 여름에는 담쟁이 넝클이 더욱고상함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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