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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과 명소 탐방.

수원 화성 을 돌아 보다..2

by 북한산78s 2013.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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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 꽃.수원 화성.

 

사적 3호인 수원 화성은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효심으로 부친의원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1794년 1월에 착공 하여서

2년 9개월 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한 성이다.

 

둘레가 약 5.7킬로 성곽높이가 4-6미터로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를 하였고 석재와 벽돌의 병용.화살과창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

적인 성곽구조를 가졌다.

 

또한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해서 과학적이고 실용

적으로 축조를 해서 건축사상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후 200여년 성곽과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특히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시설물이 무너지기도 하고 파손이 되였다.

 

그러나 축조상황을 기록해놓은( 화성성역의궤) 에 의거 1975년부터 보수, 복원

을 하여서 1997년 2월에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신위원회

제 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 입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공사기간 총 33개월)하였습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1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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