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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산행계획.

2009년 6월 24일-28일 백두산 산행 사진첩.....

by 북한산78s 2009.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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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신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백두산을 찾아서...

  • 1일차, 인천~장춘~송강하(호텔투숙)☞"아시아나
    2009년6월24일 09시40분 인천국제 공항출발(43명)10시50분 장춘도착
  • 2일차,서파산문 이동~고산화원,대협곡~천지감상후 등반 시작
  • 등반 예정등산로⇒5호경계비-마천루-청석봉-백운봉-차일봉-녹명봉-용문봉-옥벽폭포-온천지대 혹은 소 천지하산후 이도백하로 이동계획
  • 바람 심하여 청석봉 근처에서 회귀함
  • 천문봉 가기위하여 이도백하로 이동
  • 찝차로 천문봉에 오름,,,
  • 하산후 소 한마리 회식후 숙소로 이동
  • 3일차⇒용정으로 이동,대성중학교 ,윤동주 시비 ,해란강,중식후 도문강으로 이동
  • 도문시에서 이북마을 두만강 관망 뱃놀이후 연갈로 이동
  • 연길~북경예정이었으나 비행기 취소로 연길~장춘~북경으로 이동함
  • 4일차⇒만리장성,명13릉,2008년 북경 올림픽이후 "금면왕조"라는 극 공연 관람(C석260원 한화52000원 정도)
  • 5일차⇒천안문,자금성,짝퉁시장 관광....오후4시 아시아나 비행기로 귀국



백두산 등반길에서




백두산!....
한민족의 성산이며 백두대간의 머리...수많은 사람들이 염원하며 찾고싶은곳..무수한 인재들이 백두산을 찾아서 웅지를 키우며 장부의 기개를 보이던곳... 민족의 번영을 염원하며 마음속으로 빌던곳...아직은 선뜻 찾아 나서기가 쉽지않은곳...남북이 갈라져 제 나라를 두고 멀리 돌아 비행기타고 버스로 달려 그렇게 며칠을 달려가서 겨우 볼수 있는곳..그것도 운이 좋아야 천지를 볼수 있다는곳..드디어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다.관광이 아닌 백두산을 등반 목적으로 삼고서,..백두산을 휘돌아 가며 함께 우정을 나누고 삶을 노래하며 진솔한 우리를 찾고져 했던곳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 이야기 한다면 백두산 등반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말았다. 외륜 종주를 목표로 1년을 생각하고 가꾸어 온일이 5호경계비 마천루에서 예측하지 못한 무지한 바람 때문에 5호 경계비를 출발하면서 마천루, 청석봉, 백운봉, 녹명봉, 차일봉을 거쳐 소천지까지 가야할길이 청석봉도 못가보고 중국쪽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백산 근처도 바라보지 못했으니 천지를 본것으로 위안을 삼으라고 하면 그또한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고 모두들 흡족한 마음이라면 위안을 삼으려 해도 마음속 응어리는 한동안 떠나지 않을것 같다.

시간이 되면 몇몇 지인들과 적은 인원으로 다시 찾고 싶다.지리산에 한번 가면 두번 가고 싶듯이 그렇게 찾아보고 생각하고 외우고 떠났던 길이 무언가 홀린듯 중심을 잃고 허둥대고 만것 같은 안타까움은 나혼자만의 기억으로 잠재우기엔 너무 아쉬어 글로 남기며 다시 찾는 날 이 응어리를 풀수 있으리라.



천문봉에서 천지를 보고 서파에서 천지를 봤으니 복 받은게 틀림 없다지만 우린 천지를 보러 관광을 간것이 아니고 백두산 종주를 위하여 백두산 산행을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불찰이 운영진에게 있으며 앞으로 해외 등반은 좀더 공부하며 연구하여 다시는 아쉬운 응어리 남기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다짐해본다.



2007년에 한국 정세는 2009년 정도면 북한을 거쳐 백두산 오르는 길이 금방 열릴듯하여 2008년제3차 해외 등반을 일본 북알프스로 계획하고 2009년에 민족의 성산 백두산으로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금강산 관광객을 북한이 총격을 가하여 아까운 생명이 숨지고 곧 열릴것 같던 백두산 길은 다시 암흑 터널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1년을 준비하고 계획된 일이라 중국으로해서 갈수 밖에 없었다.가기로 했다.그러나 때 맞추어 신종 푸루라는 돼지 독감으로 인하여 전세계 보건 기구가 긴장하고 검역이 강화된때라 6월24일 출발일을 연기해야 하지 않느냐고 회원들 사이에서 웅성 거림이 있고 그래도 가야한다는 의견도 있고 고민끝에 11일경 등반을 정상적으로 행사하기로 결정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13억 중국 인구에 160명이 신종프루에 감염되어 있었지만 중국 자국민은 한사람도 없다는 일과 우리나라에서도 자체 발병이 아닌 외국 유럽권에서 발병하여 전염된것에 괜찮다고 판단했다.



6월24일 06시30분 최종 집결장소에 모인 분들의 얼굴이 환하고 즐거운 표정이다.여행은 집 떠나면 속된말로 개 고생이라는데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찾아가지 않는가? 우리 백두산 족은 배달 민족으로 백두산을 성산으로 여기며 살아온터라 남다른 기대와 호기심이 컸었고 일제 강점기에 육당 최남선 선생이 당시의 김충희,박한영 선생들과 함께 1926년 7월29일출발하여 8월7일까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바람을 무릎쓰고 등정한뒤 이듬해1월에 백두산 근참기를 쓰면서 쓰면서 정묘년(1926년1월22일)에 영하17도7의 엄한도 백두산보다는 여름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외풍썰렁한 곳에서 글을 쓴다고 권두에 말한것을 보면 당시 백두산 등반길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하기에 남음이 있다.육당의 동아일보에 실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후에 최남선 전집으로 출간됨) 천지를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한바 있어 늘 가고픈 염원이 한 구석에 있었다.

다음과 같은 글이 이어진다.


중략" 눈동자도 굴리지 아니하고 보고 있은즉 두리 뭉수리 같은 저 혼돈에 문득 훤한 구멍이 하나 뚫여지면서 그속에서 자금광이랄밖에 없는, 달리는 형용할수 없는 일종 영묘한 광파가 뭉싯하게 스물거리는데 ,광이 널부러지기 때문에 창이 커지는지 창이커지기 때문에 광이 널브러지는지 여하간 광파와 창구멍이 한데 손목을 잡고 영역을 마구 개척함이 마치 태평양군도의 축일(逐日)생장적 천지개벽(天地開闢)설화를 실지로 보는듯하다가 남은 구름이 바람에 쫓기는 연기처럼,이때것 처져 있음이 몹시 무안스러운 것처럼,줄다름하여 획 흩어져 버리매 이에 딴 세계가 거기서 나오는 구나.신비만의 세계하나가 문득 거기 널브러져 있구나!



"자광(紫光)으로, 금색(金色)으로, 오색(五色)으로, 칠채(七彩)로 그것이 다 기인환적(起人?的)으로 특이(特異)한 미태 정조(味態情調)로 갖은도약 무도(跳躍舞蹈)를 다하다가 홱 젖혀지고 와짝 열려지는 것은 어느 틈에 환화(幻化)한지도 모르게 얼른 전생(前生)해진 새파란 늪이 둥그러니 움푹 파인 아득한 발 아래 신비한 물결을 괴어있음이다. 억천만겁(億千萬劫)의 과거가 영원 무궁한 미래와 손목을 잡고 일대원환(一大圓環) 을 지어서, 저 늪에 가서 곤두박혔는데, 침묵 의 그 구분(九分)은 묵직하게 깊숙이 잠겨 있고, 현재의 작은 한 동강이가 겨우 등어리를 수면으로 나타낸 위에서 묘미의 아지랑이와 신비한 각색도 있고 잡색도 있어 색택(色澤)이 이미같지 아니하고 또 어떤편은 깍아질리고,어떤편은 비스듬이 자빠지고 어떤부분은 칼날같이 갈아세우고 어떤부분은 병풍을 둘러쳐서 그형상이 또한 변화에 가득하다"중략



안개에 휩쌓여 가려있다가 바람에 날리며 보여주는 천지의 신비를 더 이상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백두산 천지는 넓이 9,165 제곱킬로미터, 둘레 14,4 km, 최대수심 384m, 최대 넓이 3.55 km, 평균너비 1.975km, 수체적 19만5,500만 세제곱미터, 수면표고 2190.15미터 (1981년 7월 관측)로 되어있다.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티티카카호'(최고수심 304미터)와 2위인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있는 '라도가호'(225 미터) 보다도 더 깊어 세계 최심의 산상 호수로 밝혀졌다.



우린 산행을 하면 산행기 혹은 등반기로 표현하고 정복이란 말을 많이 쓰지만 산은 정복이 아니라 오르는 것이고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우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산행 기록으로 적어나가고 감회를 적어나가지만 육당 최남선 선생은 백두산을 두루 돌아보고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라고 하였다.



근참기....근참(覲參:뵐근,뵙다.참여할참,) 은 삼가 절하고 뵈옵는다는 뜻으로 해석되며 육당의 우리 국토에 대한 인식은 공경 하여 우러러 보는 경지 즉 숭앙의 대상으로 신앙화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1712년(조선 숙종 38년) 청나라는 백두산을 자국의 영역 내에 넣으려는 의도로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정할 계획을 세우고 청나라에서 백두산의 변경을 조사하여 시정 한다는 명목으로 목극 등을 보내자 조선에서는 접반사 박권, 함경감사 이선부 등으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 국경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늙고 허약함을 이유로 뒤로 처지고 접반사 군관 이의복, 순찰사 군관 조태상, 거산찰방 허량, 나난만호 박도상, 역관 김응헌· 김경문 등 6명만 동행하여 청나라라의 목극등의 의사대로 <정계비>의 위치가 정해졌다.

이에 백두산 동남쪽 약 4㎞ 지점(해발 2천200m)에 우리나라와 청국을 가르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졌다. 양국 간 국경선을 처음으로 획정한 것이 바로 백두산 정계비이다. 이 정계비에는"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고 기록돼 있다. 이것도 백두산의 만주의 영토가 축소되어 뼈저린 아픔이 있는데 비에적힌 `토문강'이 두만강을 지칭하는지 현재 중국 영토안의 `토문강'을 지칭하는지는 당시에도 논란거리였으며 일단은 국경 문제가 일단락 되었는데 그 후 고종 17년(1880) 청은 돌연 국경 문제를 야기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두만강(頭滿江) 상류가 도문강(圖們江)이고, 도문강이 곧 토문강(土門江)으로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 두만강 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문(土門)강은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 상류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종 22년(1885년) 간도 국경 문제가 일어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을유감계 회담을 회령에서 열었다. 이 비문 중의 토문이 논쟁의 쟁점이 되어 한국측과 중국 측간에 논의가 있어서 오랫동안 해결을 짓지 못하였다. 결국 두만강 선을 고집 하는 청과의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로도 간간이 재발한 국경 분쟁은 지지부진 매듭을 짖지 못하다가, 순종 융희 3년(1909년. 융희3년) 일본이 북경에서 청국과 회담하고 토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두만 강이 한ㆍ청의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우리 영토이던 간도 전역을 만주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 후 만주 사변 때 악날한 일제에 의해 정계비가 철거되었고 그래도 백두산이 우리의 영토안에 있었던것을 위안을 삼는다면 어불성설이겠으나 청나라가 몰락하면서 만주 지역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지역이었고 중국도 건국 초기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던 터에 한국전쟁이 일으킨 김일성이 참전의 대가로 쪼그라진 영토 천지의 반을 떼어주었다고 하니 이 천추의 한을 어찌할꼬? 지금도 토문을 두만강이라 우기는 저네들이 속셈이 끈질기에 이어지고 있는것이다.



분단의 비극으로 남북이 갈리고 백두산 사진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절은 아마 지금부터 몇년전의 일일터 근자에 와서 중국의 백두산 개방으로 하나 둘 찾기 시작하고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누구나 작가의 버금가는 천지의 비경이 하나 둘 공개되고 신비의 베일을 벗어가기시작하면서 덩달아 산행 인구가 폭팔적으로 늘어나 이젠 누구나 한번쯤 다녀와야 할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았기에 그토록 보기힘든 비경이 활짝 속내를 들어 내놓고 있을까? 천지를 쉽게 볼수 없다던데...어떤 사람들은 연속으로 5년동안 찾았지만 활짝 개인 천지의 모습으로 보지못하여 한숨만 토해놓고 있었다는데...우리가 가도 맑은 날씨가 되 줄까?



백두산은 해발 2,000m까지는 수림대이고, 그 위는 고산 초원대를 이루고 있으며 연봉은 대략 2600m에서 2700m가 되며 북한에 있는 장군봉이 2744m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며 중국이 장백산이라 부르는곳은 백운봉이라고 하며 2691m이다.

5호경계비에서 마천루(2459m),청석봉(2662m),백운봉,녹명봉(2603m),용문봉(2596m)를 거쳐 장백폭포 방향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천지주변 봉우리는 대체적으로 몹시 험하기 때문에 직접 봉우리를 타고 등반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 봉우리 후사면 이거나 일부 봉우리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오르내린다



그런데 근자에 기록을 보면 천지둘레9.2km 년중365일중 비가오는 날씨가 310일이며 첫눈이 8월30일~ 6월24일까지 내린적이 있고 8급 이상의 강풍이 267일 분다고 하며 안개는 280일이 덮여있다고 한다.거의 비가오고 안개가 덮여있고 바람이 분다는 이야기인데 많은 사람들이 등반에 나섰다가 입산 통제때문에 되 돌아 가는 일이 부지기수라고 한다.예전엔 강수량이 풍부하여14.4km가 9.2km 줄었는지는 알수 없다.



어찌 가보고 싶지 않으랴! 나이가 들어 힘이 없으면 어찌 백두산에 오를수 있으랴?

또한 유자광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앗아간 저 유명한 남이장군의 시가 이 백두산과 연계되 있어(男兒二十未平國) 죽음까지 얻게한 저 백두산은 1702년의 마지막 화산 폭팔을 남기고 아직까지 휴화산으로 남아있다.그때의 공의 나이28세가 아니던가? 공도 이산을 올라 대장부의 웅지를 키워가며 남자의 길을 갔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암송하고 있을저 남이장군의 시를 한번 보자
白頭山石磨刀盡 ,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雖稱大丈夫 ,.이얼마나 웅대하고 호연지가 가득한 남자의 기개였던가? 우리민족의 웅지는 이곳에서 호연지기로 키워가며 만주벌판을 내 달리며 넓은 초원을 우리의 영토로 만들었던것은 아니었을까?



또 근자에 저항시인이라고 할만한 양성우의 백두산 시편에서

저 백두산에 못가게 하네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물이란 물은 다 내 물이고, 산이란 산은 다 내 산인데,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내 손으로 이 깊은 밤을 으스러지게 찍고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나를 부르니,
남과 북의 말뚝 뽑은 꽃 피는 길을 다리 절며 손뼉치며 내가 가리라
흙이란 흙은 다 내 흙이고, 풀이란 풀은 다 내 풀인데 내 땅에서 내 발바닥으로 저 백두산에 내 못 가네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벙어리 한시절이 드디어 끝나고,
남과 북의 말뚝 뽑은 꽃 피는 길을 얼싸안고 덩더러쿵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저 백두산에 ,못 가게 하네 저 백두산에 내 어찌 못 가리
내 손으로 이 칼날의 숲에 불놓아 태우고,살아서 저 백두산에 내가 가리라



이 처절한 외침을 어찌 모를손가! 가야 했다.그래서 비슷한 마음의 응어리가 모여 가고져 하는 분들이 42명이었다.인원이 많아 걱정이 되었지만 모두 한마음이 이었기에 함께 손잡으며 넘어보리라 생각하고 결행하게 되었다.

6월24일 삼일전 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22일까지 내리다가 잠간 소강상태라고 한다.아직은 본격적인 비가 올 시기는 아닌가보다.속으로 내심 쾌재를 부르며 6시30분 최종 집결지에서 모두들 걱정반 근심반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비가오면? 신종프루로 공항 검색대에서 혹여 한분이라도 적발되면(체온이37.8이상) 등반은 찬물을 맞는격이다.9시40분 160석이라던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290석 비행기로 바뀌어 있었고 날씨는 화창하게 개여있었다. 장춘공항에 도착하여 송강하까지 버스로 움직이게 되었다.고속도로 국도 비포장 섞어가며 쿠션없는 버스로 400km 넘는 길을 털털거리며 가고 있었다.



고속도로가 포장 상태가 나빠서 그런가 싶어 자세히 살피니 아니다.시속120km 속도인데 털털,,아마도 버스 충격완화장치가 우리것만 하겠는가? 우리가 누군가? 이래서 준비한 곡차를 한잔씩 하게 되었고 가끔은 홀쭉이님의 멋진 입담으로 즐기며 웃으며 넘다보니 6시간 걸려 도착하게 되었다.12시40분에 출발하여 6시50분에 도착하였다.때론 잠을 청하기도 하고 우거진 녹음사이로 던져주는 깨끗한 시야가 인상적이었고 거리를 지나는 차중에 삼륜차가 유난이 많이 눈에 띄고 있었다.우리나라에서70년대 후반경에 없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볼수없는 명물을 보는순간이었다. 드넖은 곳에 인가는 별로없고 옥수수 밭만 연이어 보인다.누가 어떻게 가꾸는 것인가?

드넖은 백두산 자락의 한 귀퉁이 이곳 송강하 역시 선조들이 숨쉬며 살았던곳,,,이젠 남의 손에 넘아간 선조들의 영토가 언제다시 품안으로 돌아올까? 강대국의 침략에 속절없이 무너져 남의 영토가 되버린 국토 한 자락이 이렇게 가슴아픈 뼈저림을 느껴가면서 지날줄이야 ! 곳곳을 지날때 한숨을 쉬며 어느덧 숙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다.오며 가며 마신 술이 꽤 나 됨직한데 영 취하지 않는다.



내일 산행 준비로 배낭을 꾸리고 옷을 챙기고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꿈인가 천둥번개가 치고 꾸르릉 거린다.그래도 몸이 피곤한지 잠을 청한다.시계를 풀어놓아 몇시인지 모르겠으나 걱정이 앞선다.내일 산행이 가능할까? 비몽사몽간에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어가며 모든 피곤함이 떨어져 나가려는 순간 새벽5시를 알리는 핸드폰 알람이 운다.



잠을 좀더 자지않으면 어쩌랴..잠자는 아내를 놔두고 문밖을 나선다.현관앞에 다다르니 빗물이 흥건하다.엊저녁 천둥번개 치며 내리치던 빗물이었다.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아~ 이젠 됬다.그렇게 밤새 천둥번개를 내리치더만 영롱한 아침 햇살을 듬뿍 안기려 했던것인가? 부지런한 분들은 아침운동차 조깅을 하는 분들도 있었도 손에든 카메라엔 주변 경치가 담겨져 있는 분들도 있었다.마음이 놓이며 안심이 된다.걱정도 사라지니 마음이 가볍다.이렇게 백두산 산행은 시작은 되고 있었다.



백두산은 한반도 산악 중에서도 가장 험난한 산악으로 수백 미터나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암벽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세는 마치 태고부터 천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모인 만물들이 여기를 떠나기 힘들어 바위로 굳어져 버린 듯하며 웅장한 고봉이 복잡하게 솟아있고 산정에는 최고봉인 백두봉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고봉이 천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백두연봉 중 해발 2,600m 이상의 고봉은 16개를 헤아리고 있다.

네이버의 지식인을 빌리자면


▶ 백두봉은 표고 2,750m.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의 최고봉이다. 백두산을 대표하는 봉이라는 뜻에서 백두봉이라 하였다. 일명 장군봉 또는 병사봉이라고도 한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천지 쪽으로 뻗은 능선은 장관인데 맞은편 백운봉 아래 등성이와 흡사하다

▶ 2,719봉은 백두봉에서 남서쪽으로 약 1km 지점에 솟아 있으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들 가운데 백두봉 다음으로 높다. 정상 부근이 둘로 갈라져 있다. 이들 두개의 봉우리는 약 60m 떨어져 있는데 북쪽 것은 해발 2,708m, 남쪽은 2,719m이다. 봉우리의 정상과 기슭에는 직경 1m의 화산탄들이 널려 있다.

▶ 망천후는 표고는 2,712m. 백두봉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1.1km 떨어져 있다. 천지 호반에서 올려다보면 정상이 마치 지붕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분화구 벽의 기본 테두리로부터 70m나 천지 쪽으로 내뻗은 돌출부 벼랑이 있어 지형이 매우 험하고 바위가 많이 무너져 내린다. ▶ 천문봉은 표고 2,670m. 백두봉에서 3.8km 떨어져 있고, 분화구를 둘러싼 봉우리들 가운데 북쪽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다. 북동쪽에는 표고 약 2,500m의 백암봉이 있고, 서쪽으로는 약 2,550m의 예리하고 작은 봉이 있다. 백암봉은 문자 그대로 하얀 바위로 덮혀 있다. 북쪽에 기상관측소가 설치된 뒤로 천문봉이라 하였다.

▶ 녹명봉은 표고 2,603m. 차일봉의 끝으로부터 분화구벽을 이루는 봉우리다. 천지에 떠받들린 듯 벼랑을 깎아 세우고 솟은 녹명봉에서 남동쪽에 백두봉의 장엄한 산봉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봉우리의 이름은 매년 7·8월이 되면 백두산 명물인 사슴 무리가 여기에 올라, 봉의 그늘에서 여름을 식히고 우는 소 리가 끊이지 않아서 명명되었다. 봉우리 부근에는 겨울철에도 지하에서 더운 기운이 솟아올라 얼지 않는 곳이 있다. 따라서 백두연봉의 모든 봉우리들이 흰눈에 덮여 있어도 여기에는 풀이 눈에 묻히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늦은 가을 기분을 느끼게 한다. 봉우리의 북쪽에는 용암으로 된 굴인 녹제굴이 있다.

▶ 백운봉은 표고 2,691m. 녹명봉과 청석봉의 중간에 솟아 있고, 분화구를 둘러싼 봉우리들 중에서 4번째로 높다. 천지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평면상에서 보면 삼각형에 가깝 지만, 정상 부근에는 작게 솟은 봉이 여러 개 있으며, 수평굴곡이 깊고 지형이 매우 복잡하게 되어 있다. 봉우리의 동쪽 분화구벽부터 기암이 뻗어 내려 천지까지 이어져 있다.

▶ 청석봉은 표고 2,662m. 백운봉에서 남으로 1.3km에 있는 청석봉은 이름대로 청색암이 몇 층으로 겹쳐 쌓여 있다. 청석봉은 분화구를 둘러싼 외륜산을 따라 길이가 약 700m이다. 동쪽 사면에는 정상 으로부터 약 20m 떨어진 곳에, 높이 20∼40m의 분화구벽이 있다.

▶ 대연지봉은 표고 2,358m. 백두봉의 남동쪽 4.6km에 있는 기생화산이며, 백두산 일대의 기생화산 중에서 가장 높다. 대연지봉은 평면상에서 긴 축이 북서로부터 남동으로 뻗은 타원형이고, 봉의 형태는 둥글다. 북서쪽 경사가 제일 완만한데, 그것은 백두화산 경사면의 반대방향으로 용암이 흐르면서 쌓였을 뿐 아니라 부석이 분출될 때 겹으로 쌓였기 때문이다.

▶ 소연지봉은 표고 2,114m. 대연지붕으로부터 남동으로 3.9km의 지점에 있는 기생화산이며 남쪽으로 별도의 작은 기생화산을 안고 있다. 정상은 분화구의 동쪽에 있고 형태는 뾰족하게 솟아 있다. 소연지봉은 높이가 같은 다른 봉우리들에 비해 식물의 서식상태가 비교적 좋다.

▶ 대각봉은 표고 2,164m. 백두봉에서 7.4km에 있는 기생화산이며 그 이름대로 큰 뿔과 닮은 봉이다. 동쪽과 북쪽은 지형이 비교적 안정 상태에 있으나 서쪽과 남쪽 경사면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흐르는 토문강 원류에 의해 심하게 침식되고 있다. 북쪽과 동쪽 사면에는 해발 2,100m대까지 수목이 분포하고, 봉의 정상에도 초목이 울창하게 무성해 있다.

지금이야 각자 입맛에 지명도 바꾸고 개명하여 생소한 이름중에 정일봉이란 지명도 생겨나고 장백폭포라는 지명도 생겨나고 세월이 흐른뒤에 제 이름을 찾아갈지 모르겠다.몇년전 삼지연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백두산 관광을 추진하려 했던 삼지연은 백두용암 지대에 있는 삼지연읍에서 북으로 5km 떨어진 천연호수이며 이곳을 흘렀던 강이 백두산으로부터 분출한 현무암과 부석으로 막혀서 생긴 호수이며 둘레는 4.5km, 수심은 3m이고, 중간에 나무들로 뒤덮인 작은 섬이 있으며 호수 위에 깔린 아침 안개가 희미할 때 저쪽 멀리 있는 백두연봉을 바라보면, 호수를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이나 자작나무 숲이 수면에 투영돼서 희미하게 흔들린다. 만년설을 받아 백두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거대한 수림 속에 이 수정 같이 빛나는 호수가 바로 삼지연이다. 크고 작은 3개의 호수가 나란히 있어 삼지연이라 하였고 북한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 34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한다.

이동경로


백두산 등반및 관광은 백두산 북파와 서쪽 서파로 나눠지는데 서파는 개발된지 5년밖에 되지 않아서 도로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백두산 16개 봉우리를 등반하며 비경을 감상할수 있는 전문산악 등반 코스라고 한다. 우리는 서파 코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서파란 백두산 정상을 등반하기 위한 서쪽 능선을 말한다. 백두산 중턱까지 개발된 도로 주차장 까지 이동하여 1263여개의 시멘트계단으로 이루어진 코스를 오른뒤, 천지를 휘감은 16개 봉우리중 5개 봉우리를 주파하는 그야말로 전문 산악코스였다.



북파가 장백폭포에서 700개 계단을 올라 등정할 수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코스가 너무 어려워서 쉽게오르기가 어렵단다. 얼마전 TV에서 강호동의1박2일의 백두산 등반코스로 소개된 곳이다.조식후 백두산 등반을 위한 서파 일정이 시작되었다. 산문까지4~ 50분정도 가면 고산화원,대협곡을 보고 본격적인 서파산문에 도착하여 산행을 하기로 되 있었다.

백두산 자연 보호구로 들어서면서 서파로 가기 위한 임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로는 원시산림이 끝없이 펼쳐린 삼림지대를 관통하는 임도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서파로 가는 동안 길 양옆에는 그야 말로 빽빽한 삼림숲이다. 원시림 우거진 숲속을 보며 낮에도 저 숲속에 들어가면 어두워 컴컴할것 같았다.지나는 길에 보니 수명을 다한 죽은 고목들이 삐쭉이 솟아 있는것을 보니 삼라만 상의 생멸의 이치가 자연에 숨어 있었고 수천년 태고의 원시림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백두산의 품안 으로 접어들고 있었다.산문에 가까워지자 점차 침엽수림이 많아 진다.

고산 선원은 야생화 군락지라고 한다.도착하여보니 없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올해는 조금 늦은것 같단다.작년 이때면 야생화가 한창 필 시기였었다는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연도에 수많은 꽃은 어디로 간것인가? 또 속았군...누군가 못내 아쉬워 탄식소리가 들린다.고산 화원에 멋진 사진을 올려놓아 이번에 볼수 있다고 한 원죄가 내게 있으니...아미 타불,,,



가이드의 안내가 시작되었다.백두산 서파 종주는 산문에서 이어 마천루 5호 경계비까지1263개의 계단을 오르면 천지가 보이면서 산행이 시작되지만 5호경계비까지 오르는 계단길이 1차 시험대란다.무사히 통과하여 종주냐 하산이냐를 결정해야하며 일단 종주 시작하면 되돌아 나올수 없고 안전시설이나 구조요원이 없어 신중히 결정하란다.어쨋던 이제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나타날것이며 오르는 동안 안개가 끼고 구름이 몰려오면 볼수 없단다.마음속으로 맑고 투명한 날씨가 되기를 나혼자 빈것이 아니고 43명 똑같은 마음이 었으리라.단군의 자손 천손의 아들딸들이 이곳을 찾았는데 단군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을리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 들어가며 참 이곳까지 먼곳을 쉬임없이 달려왔구나 싶었다.비행기로 버스로 ...



드디어 5호경계비가 있는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 위하여 차에서 내리니 기온차이와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배낭속에 옷을 꺼내입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까마득한 계단 위로 능선쪽에 하얀 잔설이 남아있었고 5호경계비쪽엔 한자락의 운무가 지나가면서 멋진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이미 앞서간사람들은 저멀리 아득하게 보인다.

오르며 때론 바람과 씨름하며 아직 잔설이 있는곳을 지나기도 하고 야생화가 핀 오름지대를 올라가면서 한발한발 천지의 비경속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어느덧 5호경계비 있는 정상이다.바람이 거세고 천지의 모습은 약간의 안개가 휩쌓여 지나간듯 아직 구름조각이 널려있었고 강한 바람속에 날리는것은 비옷을 휴대한 사람들이 찟겨서 날리고 있었다. 아 !천지...한민족의 역사의 구심점이었고 수많은 영웅 호걸이 이곳을 지나면서 호연지기를 키웠고 수많은 설화를 잉태한 천지가 수많은 영겁의 세월을 깊은 못에 담아 파란 색채를 띄우며 그 모습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천지라는 표지목 옆에 중국이라는 지표석 오른쪽에는 조선이라는 경계석이 서 있으니 아! 이얼마나 처철하고 통곡할 일이던가? 현 상황으로 본다면 계단을 오른쪽으로 북한의 영토며 왼쪽은 중국의 영토가 되는 셈이다.모두들 천지를 보고 감탄하며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거센 바람도 아랑곳 않으며 소리쳐 환호하고 그렇게 짧은 시간을 보내고 이제 종주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이곳5호 경계비에서 중국쪽 마천루 쪽을 가기전에 관리원이 사람을 세고 있었다.본격적인 산행을 위한 수순인게다.



일단은 이곳을 지나면 되돌아 올수 없고 종주길을 끝가지 가야한단다.그런데....바람이 숨을 멈춘다.호흡을 하려해도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숨을 제대로 쉴수없이 강한바람이 연속 불어오고 있었다.막 경계비를 통과하여 지나가려는데 일행중 4명이 멈칫거린다.바람이 너무 세어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 간단다.함께갑시다하고 권하니 가이드왈..모든 사람에게 짐이 될수 있단다.그런말이 어디있을까 싶어 다시 함께갈것을 을 권하니 두어발자국 다시 전진하다가 포기들을 하신다.



할수없다 .안내자 한사람 붙여 하산시키고 우리끼리 가보기로 했다,,,그래서 마천루를 향하여 한발한발 전진하고 있었는데 바람세기가 보통이 넘는다.몸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바람과 싸움이라,,전혀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나 고전을 하게되었다.더군다가 너래길에 아직 눈이 녹이 않아 잔설이 있어 조심조심 넘어갈 길도 있었다.바람,그리고 너래길,이어서 눈길,사람이 많아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더 위험한것은 오른쪽은 절벽..천지가 보이면서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있었고 사진촬영하기 좋은 위치임엔 틀림없었으나 바람에 날려 헛디디면 절벽아래도 떨어질수 있는 상황인데도 몇몇 분들은 사진을 찍으려고 오른쪽 절벽쪽으로 다가간다.중국 안내가이드가 질겁을 하면서 소리치고 있었다.안되겠다 싶어 소리쳐 안쪽으로 들어갈것을 권하고 보니 앞서간 일행은 저멀이 언덕에서 바람을 피하여 앉거나 움추려 있었다.



마천우를 지나 청석봉을 넘어 오르기 전이다. 다가가 얼굴들을 살피니 걱정들을 하는 모습이 역력하고 함께 산행을 추진 하던 운영진들은 이쯤해서 돌아가잔다.가이드역시 전체가 백두산 종주를 하긴 너무 위험하단다.39명이 천지 종주는 힘들다? 여행사 대표도 백두산 천지를 보았고 계속 이런 풍경일텐데 굳이 위험을 안고 가야할 일이있겠느냐고?



몇몇 사람들께 의견을 구하니 이런날씨엔 무리란다.일부 몇사람이라도 종주할 사람을 찾으니 2~ 3명이외엔 묵묵 부답 모두들 답이 없다.작년 북알프스 사고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잃게 만들었는지 모른다.백두산 종주는 거리상으로는13km내외다.날씨가 맑고 화창하고 바람한점 없다면9시간정도 예정한단다.바람이 부는 이 상태에선 1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거란다.내심 속으로는 10명이상만 함께한다면 정 가고싶지 않은 분들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분들과 등반을 강행하리라 마음먹고 있었건만 두세분만이 찬성할분 나머지 분들은 말이 없다.두분을 따라가자니 인원이 너무 적다.최소한5명은 되야 만일의 사고에 대비할수 있는 방편이될수 있었는데 할수 없었다.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가 수월치 않았으리라.만일 사고가 생긴다면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할수가 없었다.작년 일본 북알프 사고만 없었어도 무조건 가보려 했을것이다.그러나 그이후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사고 발생시 비행기 구조나 안전요원이 없는상태여서 뒷 감당은 스스로 해야할 일이고 보면 무리수를 두어 등반을 강요할수는 없었다.최소한 10명 아니 5명만 되어도 넘어볼 심삼이었다.어깨띠 두르며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가며 달빛 받으며 그렇게 넘어보려 했었다.잘남도 못남도 없이 마음하나 서로 이어져 힘들어도 고통이 심하여 눈물이 범벅이 되어 등반을 성공한 후에 뒤에 오는 기쁨과 희열을 함께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 계획할때도 늦은 시간을 염려하여 랜턴을 준비를 요구했었고 하지 무렵이라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 어둠이 오기기전에 도착할수 있다고 확신한 상태였다. 두사람외엔 전체가 돌아가길 원하는것 같았다.카메라를 집어넣고 스틱을 꺼내들어 짝을 지어 넘어가면 갈수 있으련만,,,,이미 의욕을 잃은 상태여서 종주를 포기하기로 했다.원인을 분석하여 보니 어제밤 천둥 번개 소리에 놀란마음이 예측하기 어려운 백두산 날씨에 그간 멋진 낭만과 등반길이라 여겼던 종주길이 강한 바람이라는 복병을 만나 몸이 휘청거리고 숨을 쉴수없이 몰아치는바람,그리고 오후3시 정도면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올것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빨리 하산하여야 한다는 소리에 이미 전의를 상실한것 같았다.



아쉽다.일행이 되돌아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던져 버릴수가 없었다. 일행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있자니 또 다른 사람들이 청석봉을 향하여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순간 돌아선 일행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그들은 바람이 불고 몸이 휘청거리자 4명씩 어깨띠를 두르고 한발한발 언덕을 넘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정돈되지 아니한 어수선한 분위기에 그 칼바람에도 사진을 찍는다고 위험한 연출이 있었고..소리쳐도 개인행동이 앞서고 있었다.바람결에 소리는 들리지 않을지 몰라도 함께 어깨를 맞대며 넘어갈수 있는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해마다 해외등반에 앞서 합동산행을 실시해본다.어쩌면 많은 분들은 간단한 생각으로 하루정도 산행을 즐기는줄 모르겠으나 운영진 입장에선 여러가지를 살펴보고 팀웍도 기르며 공감대를 형성하며 서로의 의견 전달을 원활히 하긴위한 예방조치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나 하나쯤 어떠랴 싶어서 불참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가 보다.



문제가 있음을 이번 백두산 산행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황산이나 화산정도로 생각하여 등산화대신 운동화를 신고가면 어떻겠나고 묻는사람도 있었고 너무 안일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며 원정산행은 어디를 가던 전지 훈련차 예비 산행이 필수이며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분기별 실시를 원칙으로하여 산행 참석 여부에 따라 해외등반 참석 여부를 결정하여야 할것 같다.
이유야 없겠는가? 그러나 생각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하였다.자연은 쉽게 인간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그러나 인간은 함께 자연의 고난을 헤쳐나갈수는 있었다.불찰이었다.강한 바람을 예상치 못했고 이런경우 적절한 대처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운영진 책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금니 물고 하산하면서 마음속으로 비참함을 던져버릴수가 없었다.아! 조금만 더가면 이제부터 백두산의 진면목이 나타날텐데...오후3시반부터 천둥번개가 올거라는 이야기 부터가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아 백두산 천둥번개 맞아가며 넘어가죠... 했더니 안내 가이드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란다.마음속으로 이미 엊저녁 번개와 천둥소리에 놀란 가슴이었는지 바람앞에 모두들 무릎을 꿇게 되었는지 모른다.어찌 알수 있단말인가 하늘의 일을,....



청석봉과 백운봉 사이의 넓은 초원이 있고 백운봉 쪽으로는 깊은 낭떠러지로 이어져 바로 백운봉으로는 갈 수 없고 계곡하류로 한참 내려간후 다시 이를 올라가는 매우힘든 가파른 오르막 구간 을 지나면 발 밑은 억만년을 살아온 두툼한 이끼가 낀 길을 조심해 가며 약 30분 정도가면 샘이흐르기 시작하고 천지의 물을 마셔볼수 있는기회가 있었고 사진에서 보는 야생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고있다고 했었는데 오르막의 마지막은 큰 바위로 되어있는 너덜지대이나 다 올라간 곳은 평평한 초원지대를 보지못한 것이다.이끼가 끼여 두툼한 양탄자의 느낌을 주면서 걸음 을 편하게 해 준다는 초원을 걸어보지 못한 것이다. 사진을 보고 백두산 등반기를 읽어보고 메모를 해 가지고 출발하며 비교해 보려 했는데 모든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다.나중에 안일이지만 도 다른 한국팀 경희대학교 팀들도 등반을 중도 포기한것을 알게되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혼자만이 아닐것이다.



녹명봉 정상을 향해 평평한 능선을 타고 가다가 정상 뒤쪽으로 돌아서 봉우리를 지나는 길에 평평한 능선이 다시 나타나며 걷는 길 능선 우측에는 천지와 멀리 북한에 있는 봉우리 군들이 보이고 좌측에는 수목한계선 까지 밋밋한 연두색의 초원과 그 뒤로 녹색의 원시림이 수해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던가?



가다보면 백두산의 천지에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적셔볼수 있는곳도 놓쳐버린 셈이었다.돌아내려오는 길은 왜그리 깨끗한지...5호 경계비근처에 다다르니 천지가 더더욱 맑게 투명하게 보였다.아쉬움에 사진을 몇장 더 찍어보며 천지에 응어리를 묻어버리고 하산할수 밖에 없었다.



하산하고 나니 바람이 언제 불었는가 싶다.아직도 정상에는 바람이 불고 있을까? 영하3도의 날씨가 맞을까? 이렇게 다를수가 있단말인가.마음속에 응어리를 접어넣고 일정을 바꾸기로 했다. 이도백하로 가서 북백두의 천문봉을 오르기로 했다.시간이 넉넉치 않았지만 우여곡절끝에 이도백하에 도착하여 천문봉 오르는 길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여행사와 스케줄 변경에 관한 이야기가 오며가고,,,,



서백두에서 북백두로 이동하는 시간은 대략4시간 남짓한 시간이 었다.내일 일정을 일부 변경하여 오를까 하다가 내일 날씨가 비가온다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원칙적으로 모든 관광객은 호텔이 있는 곳에서 짚차를 타고 정상 주차장까지 온 후 10분 정도 비탈을 올라 천지를 보고 사진을 찍으며 40분 뒤에는 올라 올 때 타고 온 차로 다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오늘가서 천문봉을 살펴보기로 했다.백두산을 천지를 보며 넘어갈 길을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북백두 천문봉을 오르기로 했다.여러가지 애로사항과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지만 우여곡절끝에 가기로 했다.애초에 하산하려던 곳이 었으니........



이도백하는 백두에서 발원한 이도백하가 송화강(토문강)과 만나는 곳인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는 미인송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북백두로 오르기 위하여 연길로 가는 도로의 시가지는 우리의 예전 농촌 풍경을 소담하게 펼쳐보이고 있었으며 장대한 수림속으로 지나가는 차장밖에 풍경은 맑고 깨끗한 전원 풍경과 더불어 천지 둘레에 무한한 자원을 실감케하였으며 아직 도시의 잔혹한 때가 묻지않아 조금은 마음의 위로감을 찾을수 있었다.



이도백하 가는 길의 시골 모습은 아직 화려한 북경과 상해와는 거리가 멀고 번화함도 찾을수 없고 궁핍한 전원 모습이었다. 중간에 휴계실에 들렸더니 휴계실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는데 아뿔싸! 황산에서 보았던 훤히 보이는 그 화장실의 모습이 여기서도 존재하는게 아닌가? 분명 올림픽을 작년에 치뤘건만 워낙 넓은 대륙이라 빈부의 차이와 문명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던 모양이다.



북파산문에 가는 도중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도 천지를 볼수있다면 대박이란다.중국의 주석이 천지를 보고져 이곳에3번씩이나 올랐다가 끝내 천지를 보지 못했단다.아마 중국사람이라 그런것 같다고 하니 모두 웃음바다다.얼마전 한국의 정치가가 이곳에 올라 대통령 만세를 불렀단다.그때는 날씨가 맑았던 모양이다.한국 사람이 었으니까.....북파 산문에 도착하여 지프로 오르는 길은 꼬불꼬불 쉬임없이 올라가는데 운전솜씨가 아슬아슬 80km 이상 속도를 내며 브레이크 마찰음이 들리면서 올라가는데 아찔하다.정상에 아직도 바람이 불까?



천문봉 정상에 내리니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서파 바람만 못한것 같았다.이곳에서도 천지가 보이고 있었다.대박이란다.백두산에 갔다 온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진의 배경은 모두 이곳에서 찍은 사진이란다. 천문봉에서 아침에 출발했던 5호 경계비 방향을 보거나 북한 쪽의 장군봉을 또는 백운봉이나 녹명봉 쪽을 바라본다. 아쉽지만 이렇게 백두산 천지는 보고 있었으나 우리가 5호경계비에서 등반을해 왔더라면 결코 쉬운곳은 아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북한쪽에선 천지로 내려가는 계단길인지 하얀 길이 뚜렷이 보인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상에서 달문 쪽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화구벽으로 바로 내려가는길이 있었던 모양인데 다음날 다시 오른다면 가능할까 오늘은 이미 늦은 시간이었도 길이 따로 없고 바위와 흙으로 되어 있는, 약 45정도의 급한 길이란다.달문쪽 계단이 붕괴되어 달문으로 오르지 못한다고 하여 어차피 차를 타고 오른길 아니던가? 사진을 찍고 언제 다시 볼까 여기저기 살피며 눈속에 꾹꾹 담아 보지만 5호경계비에서 종주하며 걸어보는 외륜 종주만 하겠는가?



만족해야했다.어느사람은 이곳에 몇번을 올라 천지를 보지못하여 애뜻한 시를 적어다고 하지 않는가? 비가오고 천둥이 쳐서 아예 천지 근처를 가지 못했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이었겠는가 싶다.마음은 이미 차분하게 정리되어 저녁 만찬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종주하면서 원없이 바라보려 했던 천지의 모습과 야생화를 보지 못했지만 여행운이 좋아 해외등반을 시작한후로 억수같이 내린던 비도 당일날이면 말끔이 개어 비가 오지않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아직은 남의 나라의 영토를 돌아 갈라진 백두의 모습을 보았지만 언제가는 우리의 산하를 밟아가며 백두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의 등반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함께한 분들이 모두 착한사람들이라 여복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번 등반길엔 서운함도 많지만 늘 도움을 주는 날씨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고 싶다.



용정 !두만강! 토문강? 도문시에서...그리고 북경에서...


이틑날 우리는 어제의 산행을 가슴속에 추억으로 묻어두며 역사의 현장을 찾아 보기로 했다. 용정!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요람인 대성중학교가 자리잡고 있고 윤동주의 시비가 있고 해란강이 있는곳...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의 작품구상의 한 획이었던 용정은 일송정이란 소나무가 정자처럼 비암산에 있으면서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을 굽어보며 한민족의 항일운동의 지표가 되었던곳,,,이제는 해란강도 오염이 되어 탁한 모습이 되었지만 아직도 대성중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유구한 역사의 가르침을 대신하고 있다.북한의 회령과 두만강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으며 인구는 30만명이 조금 못되는데 조선족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어 면변에서는 조선족 비율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한다. 일찍 조선족이 개척한 곳이라 해방전까지만 해도 거의 조선족만 살았다고 한다.



북간도..지금은 남의 영토가 되었지만 우리민족이 간도 개척을 하면서 첫발을 디뎌 첫우물을 발견하여 용정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일송정 소나무는 소나무 아래서 항일가를 부르며 주민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일제는 1938년 소나무를 제거하려고 갖은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독립투사들의 구국에 대한 열정만큼이나끈질기게 살아남자 화학 약품을 뿌려 고사시켜 지금의 소나무는 후일에 다시 심었다고 전해지며 지금까지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안내하는 조선족 가이드집이 북파에서 용정오는 중간정도 지점에 있는 집근처였는데 지나는 길에 아직도 부모가 생존해 계시며 할아버지가 이쪽으로 이주해 오신 모양이었다.



일송정은 공사관계로 멀리서 지나치면서 바라보고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대성중학교 를 찾았다. 지금은 용정중학교로 개명되어 조선족학교로 운용되고 있으며 그안에 대성중학교가 박물관처럼 보존되어 있었다.대성중학교에 도착하자 윤동주 서시비 가 보이고 수많은 애국열사들의 고증과 사진이 있었으며 문익환목사등 젊은 시절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모두들 방명록에 서명하고 장학금 금일봉을 기부하면서 군자금을 낸다고 하여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많은 항일 애국선열의생생한 투쟁장소인 이곳을 바라보니 나라의 번영이 새삼 귀하고 존귀하게 느껴지며 일제치하에서 숨어고생한 애국지사들의 노고에 감사함을 느끼며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이곳에 올수 있었던것이 아니었을까?



이어 찾아간 곳이 도문시...
도문시는 연길에서 동쪽으로 50㎞ 떨어져 있으며 두만강 중류에 위치해 있고 인구는 14만명인데 조선족은 60%쯤 차지한다고 한다.북한의 온성군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도문은 철로와 도로로 북한과 왕래가 잦다고 한다. 또한 도문은 북한 뿐 아니라 내륙과도 교통이 아주 편리하게 철로가 놓여져 장춘, 목단강, 심양, 북경, 돈화 등등의 도시로 직접 기차가 달린다. 철로는 연길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달리면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니 산중턱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이라는 커다란 문구가 보인다.아 저곳이 북한땅이로구나 ....도문으로 가는 도중 산들을 개간하였는지 구릉과 능선이 모두 낮은 산에는 나무를 볼수가 없었다.벌거벗긴 산이 참 수난을 많이도 당하였구나...두만강은 실 개천 마냥 조그만 강이 이어지면서 바로 건너편이 북한땅과 이어져 있었다.도문에 도착하여 두만강 푸른물에 떠 있는 유람선과 뗏목배를 타면서 북한산 명태포와 막걸리를 한잔하면서 구성지게 뽑아본 노래가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아~~

강가의 유람선을 타면서 물어보았다.강물 어디가 경계선이냐고? 중간이 경계선이지만 육지에 닿는 건너편 북한땅(육지에)발을 딛으면 숨어있는 초병이 다가온단다.지금도 저 숲속 어디엔가 숨어서 혹은 잠을 자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답답한 일이다.21세기 태양이 굶주린 백성을 나몰라라 하니...

이렇게 해서 백두산과 용정 도문을 다녀왔지만 못내 아쉬움은 남는다.언제 시간이 되면 다시 찾으리라 생각하면서 긴 여행에 함께한 분들께 감사함을 전하며 많이 미숙하게 진행되었던 백두산 일정에 송구함을 금할수 없다.예기치 못한 바람 때문에 포기해야했던 아픔은 경험 미숙과 운영미숙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솔직하게 시인하며 앞으론 좀더 신중하고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고 판단할것을 다짐한다.



북경을 거쳐 귀국길에 잠시 들러본 자금성과 만리장성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남자분들은 모두 한번씩 다녀간곳이라 감흥이 적겠지만 여성분들은 자금성 크기와 규모에 놀랐으리라..7대 불가사의로 남겨진 만리장성은 볼수록 기이한 면이 많다.깍아지른 절벽에 저 많은 돌을 어떻게 다듬어 쌓은 것일까? 오후 서커스일정을 바꿔 금면 왕조라는 극을 보게되었다.작년 올림픽에 맞추어 제작한 극인데 무대장치와 스케일이 대단하다고 하며 C석 기준이 우리돈으로 오만원이 넘는 대작이었다.여행사와 협의하여 서커스를 버리고 금면왕조 극을 관람하게 되었는데 무대장치며 스케일이 대단하다.모두들 북경에와서 한건 건졌다고들한다.



무척 더운 날씨에 북경은 온도가 38도를 오르내리고 백두산은 영하3도의 기온이었으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모두 감기로 고생한다고 한다.기온이 급락 급변한곳을 다녔으니 무리가 아닐수 밖에 없다.지금쯤 많은 분들이 애석함,그리고 섭섭함을 가지고 계실터이지만 지나간 시간이다. 우린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기에 열심히 일하며 1년후에 또 다른 신비의 세계를 찾아 떠날것이다.내 조국 산하만큼 아름답고 좋은 곳은 없지만 세상는 넖고 무궁하며 세계여러곳의 볼거리가 너무 많은것도 사실아닌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살펴보려해도 이미 늙은 육신을 가지고 움직일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곳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땀 흘려 일한만큼 한번씩 세계를 향하여 나아감도 좋지 않겠는가? 많은 분들께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은 금할수 없으나 내일을 기약하며 희망을 갖고 사는것이 우리 인생이 아닐까?









저 언덕을 넘지 못한 아픔은 오래도록 이어질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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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참여한 분에 사진을 편집하고 여행기를 써주신 솔바람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건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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