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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중국

2009년 6월 24일-28일 중국 여행 10 부.

by 북한산78s 2009.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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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8일 오늘은 4박 5일 중국 여행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오늘 일정은 아침에 호텔에서 짐을 정리 해서 버스에 실어놓고 오전에 중국 수도 심장부라고하는 천안문광장을 관람 하고 자금성을 관람 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있다.

중식후에는 중국정부에서 외국인관광객은 무조건 자국에 상점을 이용하게 스케줄이 잡혀서 이용을 안하면은 여행승인이 나오지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일행은 중식후에 중국 토산품전통차와 실크상점을 들리게 되어있다.

아침일찍 무척이나 더울것으로 예상되는 날씨에 천안문광장으로 간다 중국에 정치에 중심지라그런지 광장 경비가 삼엄함을 느길수가 있었다. 길건너에는 중국 인민 대회장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천안문광장은 미묘한곳이기도 하다.


천안문광장에서 차림이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인것같은데 말도 틀린것같다. 겁 없이 이사람을 공안이 연행을 하는것을 포착해서 카메라에 담는다. 아마요즈음 북서부에 우므르자치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티벳트지구에서도 자주 분란이 나느것같아서 중국 지도층들은 머리가 아플듯하다, 하긴 옛날에는 쓸모없는 영토라 하였지만은 요즈음은 그지역이 원유나 철광석이 엄청나게 묻혀있다하는데 그리쉽게 중국 지도부 한족들이 포기를 할것 같지가 않다.


천안문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길건너 자금성을 본격적으로 관람 하게 되느데 정말명나라.청나라 들 황실이망할때가지 황제가 거주하고 수천명에 내시나 궁녀들이 거주한곳인지라그규묘로 보아도 엄청나게 크다. 한국에 우리 경복궁이나 창경원은 비교가 안된다.

하긴 고려시대나 조선조시대까지 임금을 임명하려면은 명나라에 승인을 받으러 갔으니 속국이나 마찬가지로 공양을 주기적으로 받치기도 하엿으니 우리가 대륙에 궁궐보다 크케 만들수가 없엇을것이다.


저높고높은 궁궐안에서는 백성들이 알수없게 무슨일이 벌어지고 잇었을가.. 지금은 옛날 이지만은문득 궁금하다. 지금도 한나라를 집권하면은 참모가 충실한 인물이 보필하여야하는데

옛전에는 충신아닌 사리사욕에 물든 간신이 황제를 보필하엿으면은 높은 구중궁궐에서 담너머 밖에 세상돌아가는 동정은 전혀몰랏을것 같다.


자금성을 한시간정도 관람을 하고 오전일정을 마무리 한다. 4박5일 여행을 자유시간이 전혀없이 가이드에 인솔로 정신없이 보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건 국내여행이든 이제 50중반을 넘엇지만은 견문과 지식을 옭게 보는것만으로도 만족을 한다. 세상은 좋와지여서 디지털카메라가 나와서 손쉽게 풍경이나 관광지를 그냥지나치면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나지않을장면은 소중하게 담을수가 있으니  말이다. 이번여행에 같이 동참해준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북한산 78s

 

 

 

 베이징[]의 정중앙에 있다. 규모는 남북 길이 880m, 동서 폭이 500m, 총 면적 44만㎡로 약 100만 명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장소이다. 톈안먼광장[门广场]의 전신()은 명대() 1419년에 확장된 '청톈먼[门]'  전면에 위치한 협소한 광장이었다. 광장의 양 측면에는 국가기관들이 자리하며, 1949년의 개국대전(开国)에는 무수한 관중들이 이곳에 모여 신 중국의 성립을 목격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대규모 보수와 확장공사를 통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시내 광장이 되었다

 

 

 

 

 

 

 

 

 

 

명·청 500년을 통치한 24명 황제의 거처
'그는 또 수많은 뜰을 건너가야 한다. 그 많은 뜰을 다 지났다 해도 새로운 계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 뜰을 지나고 또 다시 다른 궁전을 만나게 된다. 끝없이 몇 백 년, 몇 천 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황제가 파견한 사절은 결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권력의 고독을 다룬 프란츠 카프카의 <황제의 메시지>에 나오는 ‘그곳’은 바로 자금성이다. 8백 여 개의 건축물과 9천 여 개의 방이 있는 곳.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과 50m 너비의 거대한 해자로 에워 싸인 그곳은 카프카의 말 그대로 드넓은 뜰과 수많은 건물로 지어져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다.

 

자금성은 명·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자금성 쌓기에 나섰다. 이후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됐다. 사용된 건축 자재의 양도 상상을 초월해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됐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다.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자금성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 명의 시녀와 1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

 

하늘의 아들, 황제를 위한 자색
자금성을 가득 메운 자색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빛깔이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한다. 북극성은 하늘의 궁전이 있는 곳.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황제가 사는 궁전 역시 그 하늘을 상징하는 자색으로 지었다. 남과 북의 긴 축 위에 놓인 자금성의 건축물들은 모두 남향이다. 이는 남쪽의 양기를 받고 북쪽의 바람과 음기로부터 황궁을 보호하려는 의도다.

 

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외조)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으로 크게 나뉜다. 남쪽에 있는 외조는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의 웅장한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당나라 때에는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태화전의 앞마당에는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쳐진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이 있다.

 

자금성은 철통 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갈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의 거처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 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금성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에 공개됐다. 과거의 궁전이라는 뜻에서 공식 명칭은 ‘고궁’이 되었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해마다 600~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자금성은 여전히 중국 문화의 중심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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