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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모저모

김수환 추기경 저도록 건강 하셨는데...

by 북한산78s 2009.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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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이 2008년 5월 21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추기경 집무실에서 '월간 사목정보'와 인터뷰를 한 후 주간인 차동엽 신부를 강복해주고 있다. 김 추기경이 입원하기 전에 찍은 건강한 모습의 마지막 사진이다. 왼쪽 손등에 꽂은 링거바늘이 당시의 병세를 짐작케한다.
 <사진 제공=미래사목연구소>

 김수환 추기경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2008년 5월 21일 필자가 주간으로 있는 월간 ‘사목정보’ 인터뷰 때문이었다. 이미 기력이 쇠하셔서 면회사절 중이었음에도 필자에게는 알현의 특혜를 주셨다. 눈빛이나 말투가 또렷하지 않아 정신적으로 혼미한 기색이 역력하여 필자가 장난끼 있게 물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추기경은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로 답하셨다.

 “아, 대한민국에서 차 신부 모르면 간첩이지.”

 그날 힘겹게 나누어 주신 말씀 가운데 필자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이 말씀이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인류의 그것들을 바로 우리들의 그것으로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는 물론 신자들도 그래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2008년 5월 21일 '월간 사목정보' 주간 차동엽 신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미래사목연구소>
 헤어지는 마당에 필자는 강복을 청하였다. 이제껏 기운이 달리시어 조근조근하던 목소리가 갑자기 우렁찬 천둥소리로 변하여 천기(天氣)를 내려주셨음을 회상하자니 마음이 뭉클해 진다.

 김 추기경은 필자가 서울공대를 재학하고 있던 시절, 그러니까 민주화의 진통을 혹독하게 치루고 있던 1970년대 말, 명동성당에 우뚝 선 저항의 선봉이었다. 필자뿐 아니라 모든 대학생이, 아니 전 국민이 그의 단호한 예언의 외침 속에서 안전지대를 찾았고,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위로를 만났고, 그의 응시 속에서 미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한 청년을 사로잡았고, 필자의 진로를 뒤흔들었다. 필자는 마침내 그가 보여준 숭고한 삶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를 지원하였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 시절 김 추기경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온후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셨다. 애숭이 신학생의 눈에는 교수 신부들의 일거수일투족도 하늘의 움직임과 같아 보이는데, 하물며 추기경의 거동 하나 하나는 어떻게 비추었겠는가. 필자는 오늘도 그 말투 그 움직임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의 눈빛과 몸짓에는 항상 깊은 사색과 고뇌와 사람에 대한 자연스런 존경심이 묻어난다. 먼 발치에서였지만 필자는 어디에서건 김 추기경이 뜰 때마다 마치 스토커처럼 그에게서 흠모의 시선을 떼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으로 사제의 길을 걷게 된 차동엽 신부.
 필자가 김 추기경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신학교 4학년을 마치고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인사를 드리게 되었을 때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필자는 진한 감동을 받았다. 형식치레의 분위기가 아니라 정성과 진솔함이 흠뻑 느껴지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받은 감동을 이후 필자는 마더 데레사의 ‘한 번에 한 사람’이라는 싯구 속에서 발견하곤 ‘맞아 바로 이거야!’했던 기억이 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그랬다. 그는 꼭 한 사람씩만 안아 주었다.’

 이후 필자는 약 10년의 기간을 오스트리아 비엔나 유학으로 보내고, 세상이 한참 바뀐 상황에서 다시 김 추기경의 활약상을 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TV를 보다가 도올 김용옥과 대담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순간 필자는 걱정이 앞섰다. 당시 도올은 가톨릭과 기독교에 반하는 사상을 거의 독설에 가깝게 펼쳐내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필자는 “아니 저 양반이 왜 저길 나가셨을까? 봉변을 당하시려고”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그날 덕(德)이 지(智)를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음을 보았다. 추기경은 품으심으로써 이기셨다.

 한참 세월이 흐른 2004,2005년쯤으로 기억된다. 김 추기경께서 몸소 전화를 주셨다. 사연인즉슨, 미국의 한 고등학생이 영문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거기 질문이 있어 답변을 해 주어야 하니 도와달라시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읽어보니 사실 그 질문은 교회제도와 관련된 성의 없는 질문이었다. 인터넷을 뒤지거나 책방에 가서 사전을 찾으면 금세 답이 제공될 정도의 물음이었다. 불현듯 이 불성실한 질문에 답을 해 주시려는 추기경님의 그 자비가 확 필자를 덮쳤다. 필자는 그 성인적인 마음가짐에 홀려 정성껏 도움을 드렸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필자에게 두고두고 교훈이 되고 있다.

 이후 김 추기경은 국제 학술 대회에 발표하실 글을 쓰셔야 할 때 필자에게 자료수집의 도움을 청하시곤 했다. 미욱한 필자를 부려주심이 지금도 하해와 같은 은혜로 여겨진다.

 은퇴를 하신 이후의 일이다. 어느 날 필자가 소장으로 있는 ‘미래사목연구소’ 계좌를 통해 ‘김수환’이라는 이름으로 100만원이 입금되었다. 2006년 5월 18일자의 일이었다. 연구소가 발칵 뒤집혔다. “이 김수환이 어떤 김수환이냐” 확실히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알고 보니 추기경께서 후원금으로 보내주신 것이었다. 당시 병원에 입원 중이셨는데 필자의 활약상을 신문 지면을 통해 보시고 비서실에 연락하여 취하신 조치였다. 필자는 눈물이 났다. 추기경께서는 영적 지도자시기에 이른바 금일봉을 보내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해 말 김 추기경께서 위독하시다는 뉴스를 여러 차례 접하였다.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누를 끼칠 것 같아 감히 병문안할 엄두를 못 내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9일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왔다. 최근 발간된 필자의 저서 ‘통하는 기도’와 필자가 회원제로 매주 보내 주는 ‘복음묵상’ 테이프를 추기경께서 원하신다는 것이었다.

 숨도 가쁘시고 눈도 떠지지 않는 그 고통의 순간에 추기경님께서 선택하신 마지막 독서로 ‘통하는 기도’가 뽑히다니, 그리고 하늘같은 추기경님께서 비천한 필자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복음묵상’을 위로로 삼아 주시다니, 영광스러움을 넘어 부담과 송구함이 느껴졌다.

 김수환,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김 스테파노, 그는 노상 고뇌하는 신앙인이었다.

 사제 김수환 스테파노, 그는 천년 미래의 후배들도 닮고 싶어할 선배였다.

 김 추기경, 그는 20세기 조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이었다.

 지금 필자는 엄청난 공허에 휩싸여 있다.

 솔직히 슬픔은 없다. 선종 소식을 접하고 필자는 기뻐하였다.

 “드디어 하느님 품에 안기셨구나.”

 그리고 그날 저녁 강의 현장에서 필자는 이렇게 강변했다. 

◇차동엽 신부
 “여러분, 이제 우리가 그분을 위해 연도(=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분은 지금 천당에 계십니다. 오히려 그분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런 분은 반드시 천당에 계셔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꼭 그래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확신한다. 김 스테파노는 지금 하늘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축복을 빌고 계신다. 대한민국은, 아니 인류는 이제 한 ‘위대한 인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든든한 ‘수호천사’를 새로이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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