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지리산 피아골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산등성에서 계곡으로 가파르게 흐르던 물은 곳곳에서 빙폭으로 변해 있었다. 완만한 골짝으로 겨울바람에 깡마른 나뭇잎들과 너덜만이 앙상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연곡사를 지나 직전마을을 벗어나서 1시간 조금 넘게 산길을 오르니 작은 산장이 나타났다. 해발 850m 피아골 삼거리에 위치한 피아골 산장이다. 추운 겨울이라 오가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자그마한 산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아늑했다. 잠긴 문을 두드리니 턱수염 가득한 산장지기가 모습을 나타냈다.
피아골산장. 그곳에는 특별한 사람이 살고 있다. 산악인이나 지리산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분이다. '지리산 털보' '노고단 호랑이'로 불리며 반평생을 산과 함께 살아온 사람, 바로 함태식 선생이다.
그는 대한민국 1호 산장지기다.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고 노고단에 처음 산장이 만들어졌을 때, 그는 혈혈단신 산장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줄곧 지리산을 지켜왔다. 그가 지리산과 함께한 세월은 38년. 노고단에서 16년을 보냈고 피아골에서 22년째 머무르고 있다.
1928년 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 둘이 되는 함태식 선생은 그래서 지금은 '지리산의 가장 큰 어른'으로 불려진다. 그 만큼 지리산 속에서 오래 산 사람이 없고 지리산은 그의 삶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그를 지리산지킴이로 위촉했다. 40여년 가까이 지리산을 지켜온 지리산 큰 어른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다.
지리산 38년 지켜온 1호 산장지기
함태식 선생이 올 봄 지리산을 내려오게 된다. 이사장이 바뀌면서 지리산국립공원측이 올 봄까지 피아골 산장을 비워주길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공단은 늦어도 4월 초까지는 내려와 달라며 하산 기한을 전달한 상태다. 건강이 쇠약해진 여든 노인이 조난 구조 등을 맡아야 할 산장에서 계속 머무르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공단의 판단인 듯 했다.
38년 지리산 생활 정리를 앞두고 있는 함태식 선생을 지난 11일 지리산 피아골산장에서 만났다. 함태식 선생은 40여년 가까이 모든 삶을 바쳐 온 지리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1호 산장지기로 반평생 살아온 터전에서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산을 앞두고 그간 소회를 듣고 싶어 왔다"는 말에 그는 투정부리듯 "내려가라니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솔직히 흔쾌히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산사람으로서 영광스럽게 산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죽어도 지리산에서 죽고 싶은데, 나가라니 착잡한 심정이야. 반평생을 지리산서 살았으니 마지막도 여기서 보내고 싶어. 마땅히 갈 곳도 없는 데 말이야. 말년에 거지처럼 살게 될 까봐 걱정이 돼."
혹한의 추위, 산장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쓸쓸하고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이렇게 살아서인지 문제없다"고 했다.
- 그래도 혼자 계시다가 사고라도 나시면 큰일이잖아요?
"뭐 그래서 내려가라는 것 같아. 하기는 내가 문을 잠가놓고 자니까 죽어도 모를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산 속에서만 살다보니 도시에서는 잠시도 못 살아. 자식들이 인천에 사는데 공기가 나빠서 그런지 하루만 있어도 도무지 못 견디겠어. 내려가면 아랫마을이나 지리산 자락에서 지내야 하는데, 그럴 공간도 없고 많이 고민되기는 해."
지리산 속에서만 오래 산 사람이 산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하니 복잡한 심산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군들 수 십 년 살아온 산에서 뼈를 묻고 싶지, 떠나고 싶겠는가. 여든 나이지만 정정해 보이는 것도 지리산의 자연과 맑은 공기 덕분인 듯했다.
- 선생님이 처음 지리산에 들어오신 게 몇 년이었죠?
"1971년이었지. 내가 구례 사람이잖아. 67년에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로 지정되고 몇 년 있다 산장이 만들어지면서 관리하러 들어온 거지."
- 지리산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요?
"내가 연하반이라 불렸던 지리산악회에서 활동했어. 당시 우종수 선생이란 분이 회장이었고 내가 부회장이었지. 그때 이화여대 김헌규 교수라는 분이 세계국립공원대회에 옵서버로 참석하고 와서 우리나라서도 국립공원을 만들어야 된다 생각한 거야. 그래서 지리산악회가 같이 나섰지. 한라산·설악산 제치고 지리산이 국립공원 1호가 되는데 우리 노력이 컸거든. 그러다가 71년 노고단에 무인산장이 만들어지고 올라왔는데, 너무 산장이 엉망이지 뭐야. 오물만 잔뜩 쌓여있고. 그래서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내가 자청했어. 그때부터 시작된 게 지금까지 온 것이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 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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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선생이 지리산의 추억을 글로 써서 펴낸 <그 곳에 가면 따듯한 사람이 있다.> |
ⓒ 도서출판 초당 |
| | 38년 지리산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그는 오랜 전 기억들을 회상하며 많은 말을 쏟아냈다. 지리산을 이야기 할 때 만큼은 여든 노인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밝기만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그야 사람 구한 거지.
내가 피아골로 오고 얼마 안됐을 때인가 여대생 하나가 몸이 꽁꽁 얼어서 아침에 산장 문을 두드리는 거야. 하산하다가 미끄러져 물에 빠진 거지. 밤중에 길을 못 찾으니 웅크리고 있다가 산장으로 찾아온 거야. 신발까지 다 얼어서 등산객들과 함께 신발 벗기는 데만 30분이 걸리더라고. 소주 먹이고 뜨거운 데 있게 했더니 살아나더라고. 몸집이 좋은 여자였으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어려웠지 않았을까 싶어.
한번은 조난당한 고등학생 5명을 구조한 적이 있어. 산장에 '산동'이라고 부르던 개가 있었는데, 사람 냄새를 맡고서 계곡에서 길 잃은 학생들을 데리고 온 거야. 추위에 떨고 있던 학생들 산장으로 데려와서 살렸지. 15년 지나서 몇해 전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하더라고, 내가 당시 그 고등학생 중 한명이었다고. 하여튼 산장에 있으면서 많이 살렸어."
함태식 선생은 이런 지리산의 추억을 담아 2002년 책을 내기도 했다.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가 그것이다. 그는 그 책에서 지리산과의 만남이 운명적이었음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지리산에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피아골 산장 공사할 때 굴착공사를 시작하니 인골이 한 트럭분이나 나왔다고 했고, 옛 빨치산 출신 한 여성이 지리산에서 제를 올리다 빨치산들이 예전 그때 그 모습대로 총을 들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 실신했다는 내용도 있다. 피아골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도 언급되면서 책의 내용은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기도 했다.
지리산을 통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다양한 경험들을 책 한권에 담아 놓은 것이다.
금연 비결은 박정희..."사실 나도 '조중동' 안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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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지리산 피아골 대피소 산장지기. 올해 82세인 그는 국립공원 1호 산장지기로 지리산의 큰 어른이다. |
ⓒ 성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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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람으로만 알려진 함태식 선생이지만 그는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과 꽤 많은 교분을 갖고 있다. 이유를 스스로 "반체제인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내가 박정희로 시작해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던 군사독재 때 반체제인사였거든. 아마 그런 성향이 알려졌기 때문에 노고단 산장이 새로 지어지면서 밀려난 것 아닌가도 싶어. 그렇다고 무슨 단체 등에서 구체적 활동을 한 것은 아니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을 알고 있던지라 반감이 심했지. 내가 박정희 유신 때 공화당 망하기 전까지는 담배 절대 안 피겠다고 다짐했거든. 그래서 담배 끊게 됐잖아."
한참 말을 잇던 함태식 선생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말에 그냥 씨익 괜한 웃음이 지어졌다.
"사실 나도 '조중동' 안 좋아해."
그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노라고 전했다. 생각나는 대로 한사람씩 열거했다.
"작년에 국립공원관리공단 그만둔 박화강 이사장은 예전 해직기자 시절부터 지리산에 자주 와서 알고 지냈지. 아마 정권 바뀌고 그만두라는 전화가 많이 온 모양이야.
김태홍 전 의원도 예전에 <한겨레> 그만두면서 다녀갔어. 애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 해야겠다고 하더라고. <한겨레>가 그때 참 어려웠어. 돌아가신 한겨레 송건호 사장은 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분이었는데…."
<경향신문> 사장했던 거 누구지? 응 고영재 사장. 임기 끝나고 한번 찾아왔더라고. 간간이 잊지 않고 찾아주는 참 고마운 사람이지."
이돈명 변호사는 우리 아들 주례도 서줬는데 요즘 건강이 많이 약해지신 것 같더라고. 얼마전 광주 가서 전화드렸더니 귀가 잘 안 들리신다나봐."
그가 있는 산 속의 산장은 혹독했던 시절, 뜻있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오던 사람들이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40년 가까이 지리산을 통해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그의 기억은 또렷하기만 했다.
케이블카는 안 돼! 산은 그대로 놔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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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장에서 취사를 하고 있는 등산객들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함태식 선생 |
ⓒ 성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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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태식 선생은 한 때 '노고단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가 올라가기 전 초기 노고단 산장은 무질서 했다. 그가 살기 시작하면서 엄격한 산장 이용 수칙을 적용했고, 이후 질서가 잡혔기 때문이다. 엄격한 규정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은 여러분이 깨끗해지기 위해 찾아오는 곳입니다. 산에 와서만큼은 깨끗하고 정결해야 합니다. 도시의 먼지는 도시에 가서 터세요."
그 때문인 듯 지리산 자락에 골프장이나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는 시도에 대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산은 그대로 놔둬야 되는 것이지 자연을 건드리면 그 피해는 결국 사람에게 되돌아온다"고 우려했다.
최근 환경부가 지리산 천왕봉 등 주요 국립공원 몇 군데에 케이블카 허용 쪽으로 방침을 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강하게 비난했다. 15일 환경부의 방침이 알려진 후 의견을 묻자 전화선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산은 걸어서 올라가는 곳이지 차를 타거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곳이 아니야. 왜 그렇게 산을 못 망가뜨려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반드시 막아야 해. 내가 정신 나간 짓 하지 말란다고 꼭 좀 써줘.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하산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지리산 큰 어른은 지리산 걱정에 또 다른 시름이 깊어지는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