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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상식

인천 문학산.논현동 지역.

by 북한산78s 2008.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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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옛 읍 지역

 

◀ 인천부 옛 읍 지도

이 지역은 인천의 주산인 문학산을 중심으로 2천여년 전의 백제 건국 설화가 담겨져 있는 곳으로써 일찍이 비류가 나라를 세웠던 인천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에서 강희맹은 이곳이 옛 미추홀국이라고 기록하였으며 '여지도지'에서는 문학산이 미추홀 왕국의 옛 도읍지이다. 그리고 '동사강목'에는 문학산에 비류성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인천의 발상지다. 비류가 미추홀 왕국의 터전을 잡은 이후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긴 역사속에서 이 고장 생활터전의 중심지로 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지명 또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별해 오면서 1413년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처음 인천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1) 문학산

문학산이란 이름은 '여지도지'에서 처음 나온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남산이라고 불려지고 있어 문학산이란 이름이 생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문학산은 인천의 진산으로 (높이 216m) 일명 '배꼽산'이라고도 불려왔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어(6·25이후 사라짐) 멀리서 보면 마치 배꼽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2) 문학산성

이 산 정상에는 토성이 있고 그 외각에는 돌로 쌓은 성이 이중으로 조성되어 있으나(동국여지승람에는 성 둘레가 403척이나 된다고 했음) 모두 없어지고 현재 정상 동북쪽에 70여m의 외부성곽이 남아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때 김민선 부사가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개축하고 왜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워 왜군을 물리친 자랑스런 곳이기도 하다. 1591년 1월말 경 부평에 주둔하고 있던 소서행장(고니시유끼나가)부대 왜군들이 인천에 침입하였을 때 김민선부사가 이끄는 인천군과 문학산성에서 대결하였다고 한다. 인천군을 얕잡아보던 왜군은 1차 공격에서 크게 참패하고 말았으며 참패한 왜군은 대군을 몰아 다시 2차 공격을 해왔으나 김민선 부사는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성을 지켰다. 왜군들은 백성들을 몹시 괴롭히다가 그해 4월에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고 한다.

 

3) 비류 우물

이 산 정상에는 우물이 있다. 1778년에 쓰여진 '동사강목'에도 성안에 '비류정'이 있어 그 물맛이 시원했다고 기록이 있으나 그 우물이 생긴 연대는 알 수 없다. 6.25 직전까지 우물터가 있었으나 6.25 전쟁중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과정에 우물이 훼손되어 없어졌다고 전한다. 우물의 위치는 문학산 정상 북동쪽 성벽내에 있다(현재 남아 있는 부쪽 성벽 중간 지점).

 

4) 안관당

안관당은 임진왜란 때 문학산성을 지키다 순절한 김민선(1542∼1593) 인천부사를 모신 사당이다. 안광당이란 관의 힘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봄, 가을 년 2회에 걸쳐 읍민이 다같이 참여하는 제사를 올렸는데 이 제사는 그 후 20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으며 사당이 헐려 없어진 후에도 다시 계속되어 6.25 전란 때 까지도 이어졌다고 전한다. 그 위치는 문학산 정상 북쪽 성벽 뒤쪽에 있었다고 한다.

 

5) 미추홀 왕릉

'여지도지'나 '인천읍지'에 부읍 남쪽에 미추홀 왕릉이 있다고 했다. '인천읍지'에는 "부읍 남쪽 남산(문학산)에 미추홀 왕릉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능이 있는데 봉분이 헐리고 망부석이 넘어져 방치된 채 흉하다" 라고 전한다. 그러나 아직 비류 왕릉이라고 추측되는 미추홀 왕릉은 그 위치마저 찾지 못하고 있으미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6) 삼호현

문학산의 봉우리와 노적봉 사이에 관교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긴 고갯길이 있는데 이 길을 삼호현, 함호재고개, 사모지고개 라고 부른다. 이 고개는 백제의 근초고왕 때(372년)에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을 연 한나루로 가는 길목이다. 지금부터 1600 여년전 백제의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이 고개를 넘으면서 사신을 배우하는 사람들고 이별을 나눈 곳이라고 한다. 이곳까지 따라온 가족이나 친지들이 능허대 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을 무사히 잘 다녀오기를 빌면서 떠나는 사람을 세 번 크게 불렀다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듯 문학산은 산줄기 골짜기마다 이 고장의 선조들이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생활터전이다. 이 산의 북쪽 골짜기에는 문학동, 관교동, 학익동 그리고 동쪽 골짜기에는 작은 도장, 큰 도장 벽개골, 넘말 등이 있고 남쪽에는 마리, 미그미, 본마을들이 이 산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으니 문학산은 비류왕국의 신비를 지닌 인천역사의 발상지다.

 

 2. 문학산 북쪽의 생활터전

 

1) 인천도호부의 소재지 관교동

 

◀ 문학산의 옛 생활터전

문학산 북쪽은 옛부터 관교동의 그 중심지다. 관교동은 옛날 백제,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긴 세월 이 고장을 다스리던 원님이 계시던 관청과 향교가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인천이 개항된 1883년 8월까지 이곳에는 인천도호부가 자리잡고 인천부사가(종 3품) 행정을 펼쳐 오던 곳이었으나 그해 9월 19일 인천 초대 감리에 조병직이 임명되면서 인천도호부가 인천감리서로 옮겨지고 인천 감리가 일반 행정과 외국 영사 업무와 통상 업무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1910년에 으러서 인천부가 인천항 중심의 구시가지로 축소됨에 따라 관교동은 자연히 인천부에서 떨어져 부천군으로 속하게 되니 핝거한 구읍지역으로 변하고 이곳에는 부천군청이 새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일제의 침략으로 이 지역은 옛 문화 유적마다 모두 헐려없어지고 수천년 전부터 이룩해 온 이 고장의 자랑스런 생활터전은 이제 그 뿌리까지 뽑혀진 채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이 관교동 주위는 이 고장 옛 조상들의 뿌리를 간직했던 인천의 발상지란 점을 새롭게 깨달아 옛것을 소중히 보존하고 가꾸는 마음이 있어야겠다.

 

2) 관교동의 지형

관교동의 지형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외세의 침입을 이중 삼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천연적인 조건을 잘 구비한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문학산은 높지 않지만 그 정상에 올라서서 둘러보면 동으로 수리산, 북으로 계양산, 남서쪽은 넓은 인천 앞바다로 둘러싸여 멀리 대부도, 영흥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이 산은 외세의 공격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는좋은 입지조건을 갖고 있으며 특히 관교동을 높은 곳에서 한눈으로 살펴보면 마치 호리병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남쪽은 문학산, 서쪽은 도천현, 북쪽은 승학산에 에워싸여 분지를 이루고 동쪽만 호리병 입구처럼 좁게 열려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외각지대는 다시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서쪽은 넓은 인천 앞다바다가 막고 있고 북동쪽은 싱기천이 용현동 골짜기에서 시작하여 관교동 북쪽 외각을 흘러 승학동 남동산업단지를 지나 연수동 앞바다로 흘러 수성(水城)을 이루고, 다시 그 외각지대인 북쪽과 동쪽은 계양산, 철마산, 만월산과 관모산, 소래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니 외세를 이중 삼중으로 방어할 수 있는 천연적인 조건을 갖춘 관교동이야말로 이 고장의 명당중 명당이다.

 

3) 유적지

인천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나 문화재가 부족한데다 관교동을 중심으로 한 문학산 북부 지역은 인천의 발상지로서 보존되어야 할 유적다운 유적 하나도 제대로 남은 것이 없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4) 지석묘

 지석묘는 학익지석묘, 주안지석묘, 그리고 문학지석묘가 있다.

 

5) 학익지석묘

이 지석묘는 1927년 발굴 조사되었는데 발굴 당시 찾아진 돌도끼, 돌칼과 같은 유물들은 모두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 지석묘는 원래 현 학익동 소년교도소 자리에 4기가 있었다. 일제시대 교도소를 짓는 과정에서 3기는 모두 없어지고 나머지 1기가 교도소 서편 언덕에 있었는데 1971년 교도소 확장 공사로 자유공원으로 옮겨졌다. 1990년에 다시 옮겨져 현재 송도 인천시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6) 주안지석묘

주안지석묘는 주안도자기공장 서편에 있던 언덕 즉 주안 '사미'의 '너분바위'에 여러 기의 오래된 지석묘가 흪어져 있었는데 1957년 인천박물관에서 이 지석묘를 발굴 조사했다. 부장품은 발견하지 못했고, 1979년 8월 이 지역이 대규모 아파트단지로 조성되면서 그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그중 1기만이 수봉공원 반공회관 언덕길 옆에 옮겨져 있다.

 

7) 문학지석묘

문학지셕묘는 문학산 분쪽 줄기인 도처현고개 남쪽 밭 가운데 있는데 1962년 조사를 했으나 석실이 모두 훼손되어 부장품은 발견하지 못했다. 1979년 이 지역이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수봉공원으로 옮겨져 주안지석묘와 나란히 보존되고 있다.

 

8) 인천도호부 청사 (인천광역시 지정문화재 1호)

인천도호부는 현 관교동 문학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인천도호부청사를 지은 연대는 알수 없으나 강희맹이 쓴 '인천부승호기'에 의하면 1424년(세종2년)에 이미 청사가 있었다는 기록을 불 때 이 청사는 매우 오래된 것 같다. 특히 이곳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고장을 다스리던 행정의 중심지였으므로 옛날부터 관아청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인천도호부 청사도

인천부 읍지에 의하면 인천도호부 청사의 규모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비교적 그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그 규모를 보면 객사, 동헌, 사령청, 군관청, 작청, 옥사, 사창, 좌기청, 훈무당, 군기고형청, 화약고 등 다양한 청사가 구비되어 있음을 볼 때 당시 도호부 청사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제 때 일인들이 그 자리에 문학초등학교를 지어면서 도호부청사는 대부분 헐리고 동헌일부를 문학초등학교에 옮겨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 후 군관청은 해방전까지 파출소로 사용되다 불타버렸고, 내동헌은 1955년경까지 문학 출잘소로 사용되다가 새출장소 건물을 짓고 이전하면서 헐어버렸다고 한다.

 

9) 인천향교

인천향교는 관교동 문학초등학교 동쪽 500 여미터 승학산 남쪽 기슭에 있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각 지방의 주와 현에 국자감을 축소한 향교를 세워 지방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실시한데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7년(1398년)에 각 지방에 향교를 설치 운영하게 되었다.

인천향교를 지은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최항'의 중수기에 의히면 세조 때(1455∼1468) 중수되었다느 기록으로 보아 이 향교는 매우 오래된 향교임을 알 수 있다.

인천향교에는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와 같은 여러 성현의 위패와 최치원과 같은 우리 나라 역대 유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인천향교야말로 옛날부터 이 지방의 인재를 기러 온 우리의 오랜 전통적 교육의 뿌리를 지켜온 교육의 전당이다.

 

 3. 문학산 남쪽의 생활터전

 

문학산 남쪽은 옛 인천부 서면에 속한 지역이다. 현재 청학, 옥련, 동춘, 연수동 지역이 이에 속한다. 이곳 지형을 살펴보면 북족은 문학산 줄기가 동서로 길게 병풍처럼 펼쳐져 양지 바른 살기 좋은 생활터전으로 일찍부터 개척되어 온 고장이다. 확 트인 팔미도 앞바다를 낀 넓게 발달한 갯벌에서는 어패류가 풍부하고, 또한 공기도 맑아 옛부터 장수촌으로 알려지고 인물이 많이 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1) 인주 이씨

인주 이씨는 이 고장의 명문 가문이다. 일찍이 고려조에 왕후와 재상을 비롯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인주 이씨의 시조인 소성벽 이허겸의 손자 이자윤의 딸들이 문종비가 되면서 순종, 선종, 헌종, 숙종, 문종, 예종, 인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번창하였으니 이로 인해 인천이 고려조의 7대 어향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7대 어향이랑 순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에 걸쳐 왕의 외가, 왕비의 친가가된 고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고려초기에는 한 변방으로 션감이 다스리던 소성현이 경원군으로 격상되고 그 후 다시 인주라고 불려지게 된 것도 모두 인주 이씨가 고려조에 득세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연일 정씨

조선조에서는 청량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연일 정씨 가문이 있다. 이 가문에서는 조선조 영조대에 정우량, 정휘량 형제 분의 정승을 비롯해 부마, 판서 등 여러 인물이 나온 곳으로도 유명하다.

 

3) 염전땅에 개척된 남동산업단지

 ◀ 남동산업단지 지역의 옛 지형

이곳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넓은 하구와 만이 겹친 지역으로 바닷물이 나가면 연수동과 건너편 '호구포' 일대 그리고 내륙 깊숙이 이어지는 넓은 지역은 쓸모없는 갯벌지대였다. 1907년경 주안 지역에서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 생산 실험을 하여 처음 성공을 거두자 주안염전을 크게 확장하였고, 이어서 서해안 갯벌 지역에 염전을 확장하는 계획이 세워지자 이곳 버려졋던 남동 갯벌을 이용하여 1921년 남동 염전이 생기게 되었다. 처음 300 여 정보로 시작하면서 다시 이웃에 있는 군자에 1925년 575정보나 되는 거대한 염전이 생겼고 계속하여 1933년에는 남동염전에 1200정보의 염전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 당시 전국 소금 생산량을 살펴보면 약 30만 톤이 되었는데 주안, 남동, 군자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15만톤이 되었다고 하니 이 지역에서 나는 소금이 전국 생산량의 1/2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소금값은 소금 한 가마니와 쌀 한가마니가 맞먹을 만큼 값이 좋아서 염전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그후 1960년대에 와서 남동 염전은 결국 없어지고 그 자리에 남동산업단지가 개척되었으니 이 고장은 다시 한번 거듭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4) 새로 개척된 생활터전 연수 지역

문학산 남쪽 남동산업단지와 마주보면서 연수동에서 동춘동에 이르는 대아파트단지는 활기차다. 이곳은 인천사에 새롭게 등장한 신도시오, 인천 시민이 개척한 또 하나의 새로운 생활터전이다.

이 지역은 원래 대부분이 바닷물에 잠기는 갯벌 지역이었다고 전한다. 이 지이 은 바다를 개간해 낸 방죽에 관련된 지명이 유달리도 많았다. 편산이방죽 또는 해룡이방죽, 숭어방죽, 함박이방죽이란 곳이 있고 가양곶, 배꼽부리와 같은 해안의 돌출부 또는 부수지와 같은 물이 잠기는 지형과 지명도 많다.

이 지역은 대개 산줄기를 따라 부락이 형성되었고 그 외에 해안과 접한 넓은뜰은 대부분 농지로써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다. 이 지역은 일대를 옛날에는  '먼우금'이라고도 불렀다. 대부분 해변으로 이어져 있어 물이 들어오면 곧장 갈 수 있는 길들이 모두 바닷물에 잠기면 빤히 바라보이는 가까운 거리도 해안을 꼬불꼬불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곳 길은 모두 가깝고도 먼길이라는 뜻에서 '먼오금' '먼우금' 이라고 부려졌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은 해안의 공기가 맑고 겨울철이 따뜻해 사람의 수를 늘릴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이란 뜻에서 연수동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에는 일찍부터 결핵환자 요양원이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 이 지역은 인천에서 가장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터전으로 발전되리라 믿는다.

 

5) 해물의 보고 황금 갯벌

해안가 송도, 척전, 동막, 고잔 지역은 천연적으로 잘 발달한 넓은 갯벌을 갖고 있어 아득한 옛 조상때부터 이 고장은 조개류가 풍부한 명소로 이름 나 있다. 이 갯벌에는 백합무, 가무락, 맛살, 동죽, 바지락 뿐만아니라 낙지도 맣아 1945년 경까지만 해도 인천시민 누구나 갯벌에 나가 조개를 잡을 수 있는 낭만어린 바다였다.

현 남동 산업단지와 연수아파트단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조갯고개나 동막은 조개탕이 유명하여 경향 각지에서 많은 손님이 모여 들기도 했다. 특히 황금빛으로 황홀한 낙조 관경을 즐기며 석양배르 드는 멋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인구의 급증으로 인한 조개의 남벌을 방지하고 이 고장 어민의 생계를 보호하기 위해 어촌계가 조직되어 조개 양식에 힘쓰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지역 5,000ha에 이르는 넓은 갯벌에서 한 때 연각 700만 톤의 조개가 생산되는 황금 갯벌이었으나 계속되고 있는 해안 지역의 매립으로 갯벌이 침식되고 날로 늘어나는 공장폐수로 갯벌이 오염되면서 이 천혜의 보고가 병들어 가고 있다.

 

6) 유적지

(1)능 허 대

옥련동 해안가에는 일찍이 백제 근초고왕 21년(372년)에 중국과 황래할 수 있는 해상교통로가 개척된 한진나루(한진)라 불려진 포구가 있었다. 이 한진에서 배를 타려고 나온 사람들이 머물러 기다리는 장소가 바로 능허대다. 백제가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못한 관계로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육로가 막히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바닷길을 개척한 곳이 한진에서 적적을 거쳐 산둥반도로 이어지는 해상통로다. 백제는 약 100 여년간 동진, 송, 북위, 나라들과 사신을 교류했다. 결국 능허대는 이 고장에서 최초로 생긴 국제 항구가 되었던 것이다.

1988년 수산고등학교 남쪽 500m지점 해안도로 길옆 언덕에 능허대를 기념하는 정자가 세워졌다. 10 여년 전만해도 이 능허대 정자가 있던 곳은 바닷물이 출러이는 조객고개 언덕이었는데 1980년대 이 일대 해안을 매립하여 해안도로가 생긴 후 이 능허대 자리는 육지속의 작은 언덕이 되고 말았다.

 

(2) 논현포대

남동산업단지 남족 끝 못미처 소래포구로 가는 구도로 입구에 논현포대가 있다.

구한말 허새안 일대에 이양선과 왜선의 위협이 자주 있게 되자 이 지역 해안을 방어하기 휘해서 화도진과 연회진이 설치되었다. 각진은 예하에 여러 포대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논현포대는 화도진에 속해 있던 포대로서 1879년 어영대장 신정희에 의해 설치되었다.

지금부터 100 여 년전 이곳 '호구포'는 작은 어선이 드나들던 한적한 포구였지만 호구포 앞 하구로부터 수로를 따라 올라가면 송기천과 연결되어 내룩 깊숙이 선학동과 주안을 거쳐 용현동까지 배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포구느 수로를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는 군사상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어 이곳에 포대가 설치된 것이다. 이 논현포대는 호구포 포대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3) 수인선 철도

수인선은 인천과 수원간을 연결하는 철도다 이 철도는 1936년 6월 1일 경인철도 주식회사가 공사를 맡아 1년 2개월만인 1937년 8월 1일에 개통을 보았다 남동 염전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철교를 부설하여 개통된 이 협궤열차는 남동, 소래, 군자 염전을 거쳐게 설계되어 있어서 염전지대에서 생산되는 많은 양의 소금을 손쉽게 수송할 수 있는 중요한 수송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철도와 연결되는 시흥, 안산, 화성군 야목지역의 각종 농산물이나 수산물을 대도시로 공급하느 오직 하나뿐인 이 철도는 ,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활로를 열어주는데 큰 몫을 해왔다. 이 철도를 달리는 기차를 동차라고 부러왔다. 멀리 다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마치 목이 쉰 송ㅇ아지 울음처럼 들리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덜커덕커리면서 뒤뚱뒤뚱 달리는 동차는 길이도 짧고 내부가 좁아서 늘 만원이었다. 수인선이 개봉될 당시는 숭의동 (혀 시외터미날 앞)에서 차가 출발 했으나 그 후 시발역이 송돌로 옮겨지고 다시 1980년대중반에 들어 연수 지역이 개발되면서 소래역이 시발역으로 되더니 이제 수인선 동치는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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