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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인천 수인선 꼬마열차

by 북한산78s 2007.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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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평야' 추억 저편으로

1930년대부터 남동염전 일대 연 15만t 생산

 

인천시 연수구 선학동~남동구 남촌동~논현동 등지 커다란 갯골과 맞닿아 있던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구한말까지 이 동네는 ‘염말’이라 불렀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 밭이 많았기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1930년대 초 남동염전이라 불렀던 이곳을 포함해 소래, 군자 등지는 전국에서 제일 큰 소금밭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됐던 소금은 연간 15만t에 달했다.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이르는 양이었다. 당시 일제는 인천출장소를 세워 염전과 그 곳에서 생산된 소금을 관리하면서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수인선은 소금 때문에 생겨났다. 1937년 8월6일 ‘꼬마열차’ 수인선 협궤열차의 첫 기적소리가 울렸다. 조선경동철도(주)가 공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수원역~ 인천시 중구 신흥동 삼익아파트 인근에 있던 남인천역까지 총 52㎞에 이르는 철도 부설공사를 끝마친 것이었다.

본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수인선은 1931년 개통한 수여선(수원∼여주 간 74.3㎞)과 맞닿아 있어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여주이천 쌀의 수송도 맡았다. 수인선은 해방 후 사설 철도와 부대시설 국유화 조치(1946년 5월10일)로 다른 철도와 함께 국가에 귀속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15개 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던 수인선은 이때부터 급격히 사향세로 들어섰다.

쌀 수송의 의미가 거의 사라진데다 다른 염전지대의 확장과 물량 확대, 버스와 트럭 등 대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수인선의 승객과 화물이 눈에 띄게 줄었던 것이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자 철도청은 1973년 11월 송도~남인천간 5.9㎞의 운행을 중단했다. 수인선은 1년 전에 이미 끊긴 상태였다. 1992년 7월에는 소래역~송도역 운행을 끊었고, 1977년부터는 수인선에서 화물운송이 사라졌다.

수인선 복선전철화 계획을 구체화한 1994년 9월에는 한양대 안산캠퍼스~송도역 26.9㎞ 구간을 폐쇄하고 수원∼한양대역까지만 열차를 운행했다.

철도청은 하루 평균 이용객이 250명에 불과해 적자가 연간 20억여 원에 이르자 1995년 12월3일 여객운송도 중단했다. 수인선 전 구간이 완전 폐쇄한 것이었다.

수인선 완전 폐쇄의 아쉬움은 ‘꼬마열차’에 얽힌 진한 추억을 이어졌다. 표준궤도 열차의 절반 폭(76㎝) 밖에 안 돼 무릎을 맞대고 이야기꽃으로 정을 나눴던 협궤열차안의 풍경,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에서는 손님이 내려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했던 기억, 92년 7월까지 송도역 주면에서 열렸던 아낙들의 ‘반짝시장’, 지난 90년10월 화성군 매송면 야목 건널목에서 협궤열차와 소형버스가 부딪혀 꼬마열차가 넘어지고 만 웃지 못 할 일…

그러자 실현되지 않았지만 인천시는 2000년 하반기부터 수인선 ‘꼬마열차’를 관광열차로 운행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당시 시는 의왕시 철도박물관에 보관 중인 협궤열차 중 2~3량을 들여오기도 했다. 남동구청 앞에 전시한 열차가 바로 이것이었다. 꼬마열차는 2009년 수인선 전철로 그 부활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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