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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과 명소 탐방.

인천시 문화재( 기념물) 68호..

by 북한산78s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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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의 영일정씨의 판결사공·승지공파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인 1607년(선조 40)에 승지공(承旨公) 정여온(鄭如溫. 1570~1632)이 부친 정제(鄭濟. 1540~1607)의 묘소를 연수구 청량산 밑[일명 능어리(陵御里)]에 모신 후부터라고 전해 온다. 이후 후손들이 청량산 동쪽(먼우금) 지역과 봉재산 기슭(동막, 척전마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10대(代) 4백여 년 이상 인천에서 가계를 이어온 대표적 종중(宗中)이다.

○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42년, 1871년, 1899년 간행)의 총묘(塚墓: 무덤) 조항에 등재된 영일정씨는 강원감사 정시성(鄭始成. 1608~1678), 판돈녕부사 정수기(鄭壽期. 1664~1752), 우의정 정우량(鄭羽良. 1692~1754), 좌의정 정휘량(鄭翬良. 1706~1762), 참판 정원달(鄭遠達. 1735~1805) 등이다. 또한 인물 조항에는 효자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가 내려진 정세빈(鄭世賓)이 등재되어 있다. 이 외에도 제주목사를 지낸 정석빈(鄭碩賓), 영조의 사위였던 정치달(鄭致達: 정우량의 아들) 등도 영일정씨 가문을 인천의 명문세족으로 자리 잡게 한 주요 인물들이다.

○ 묘역 내에는 17기의 묘소(일부 묘소 제외)와 묘비, 문인석(文人石: 무덤 앞에 문관 형상으로 만들어진 돌), 석양(石羊: 죽은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돌짐승),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의 양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로 만든 기둥), 상석(床石: 무덤의 봉분 앞에 설치해 놓은 석물. 일명 상돌) 등 석물(石物) 66점이 보존되어 있다. 이들 석물은 조선 중기~후기 미술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묘제 양식의 기본 상식을 알 수 있고, 당시의 문화와 생활의 한 부분을 엿 볼 수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지대하다.

인천시가 시 문화재(기념물)로 지정한 연수구 동춘동의 영일 정 씨(迎日鄭氏) 묘역에 대한 인근 주민들이 반발이 거세다. 주민들은 시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민관 소통이 없었으며, 기념물의 가치도 문화 재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해당 지역 기초단체인 연수구도 문화재 지정 재검토 요청안을 시에 제출했다. 인천시는 이달 안에 외부인사로 구성된 문화재위원회에서 주민 의견을 검토하기로 했다.

▶인천시, 지난해 3월 지방문화재 지정 고시

인천시는 지난해 3월 ‘영일정씨 판결사 공파·승지공파 동춘 묘역’을 시 문화재 68호로 지정·고시했다. 동춘동 52-11, 177, 산 3번지 일대(2만 737㎡)에는 분묘 17기와 화강암 재질의 석물 66점이 배치돼 있다. 묘역은 현재 영일 정 씨 종중이 관리하고 있다.
영일 정 씨 가문은 1607년(조선시대)에 묘소를 청량산 아래 동춘동에 조성하고 400년간 인천서 자리 잡은 사대부 집안이다. 묘비석을 비롯한 석물 66점을 통해 조선 후기 미술사의 변화를, 종중 소유의 교지·화회문기(재산분배 문서)·완문(조선시대 관아에서 발급하던 증명서)·소지(잡지) 등 고문서에서 조선시대의 정치·사회·경제 상황을 연구할 수 있다는 게 시의 문화재 지정 이유다.

 

인천시가 문화재로 지정한 문화재가 주민들과 갈증을 빚고 있다.

청량산아래에 400여 년을 터 잡고 살고 있는 영일 정 씨 종중 묘역은

주변 아파트의 재건축을 두고서 갈등이 증폭 되고 있다.

인천시와 쉽게 해결이 나지 않을것 같다.

재건축 아파트 담벽에 붙은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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